예수쟁이들과의 대화록

김석태 목사님께 (2006 년 8 월 21 일)

sarnia 2006. 9. 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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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태 목사님께 (8 월 21 일)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사실 좀 놀랐습니다. 뜻 밖의 공개서한을 받게 되어서도 아니고 장문이어서도 아닙니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하다 보면 글의 종류를 대강이나마 판별할 줄 아는 조그만 능력이 생깁니다. 제가 목사님의 편지를 정독하면서 놀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정성과 기울이신 심혈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도의 정성과 심혈은 아버지가 딸에게 보낸 네루의 옥중서신같은 글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드문 예로 상대방뿐만 아니라 제삼자들에게도 감동과 공감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한 의미 있고 귀중한 말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래알이나 바위덩어리나 물에 가라 앉기는 마찬가지라는 영화 올드보이' 의 대사가 떠 오릅니다. 영화에서와는 다른 의미지만, 박사학위를 가진 전문가나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일자 무식한 사람이나 자기경험과 사고한계 안에서 주장을 펴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토론이 서로를 재검증 하여 사고 한계의 폭을 넓혀 주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토론은 자기논리의 엄밀성을 제고시켜 줄 뿐만 아니라 상대방 주장 안에 있는 나름의 타당성과 완결성 또한 확인하게 해 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양쪽이 모두 자극을 받고 보다 진전된 사고와 행동을 이룩해 나갑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Image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면 이런 지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수 십 년을 목회해 오신 대가들이 모여 있는 기장홈피에 목회는커녕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는 제가 당돌하게 글을 올려 댄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스스로를 확인하고 재정돈해 나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이념적 반대자가 아니라 이념적 정지상태입니다. 기독교 교리이든 주체사상이든 신자유주의든 일정하게 정돈된 논리를 불가침의 성역으로 삼고 도전을 거부할 때 반드시 그 안에는 수상쩍은 의도가 숨어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집단이 아닌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지상태는 불가지와 불합리에 대해 의문과 저항을 하려는 인간의 지적인 본성과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인 본성이란 유식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인간 일반의 속성을 말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저는 토마의 의심을 인간의 지적인 본성에 충실한 솔직한 행동으로 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믿는걸 못 믿겠다고 한 그의 정직한 고백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의심과 믿음의 충돌은 토마를 고민하게 했고 이 남다른 경험이 그를 보다 확실한 사도(요한복음 20: 28)로 탄생시켰습니다. 무조건 믿는 것 보다는 번거롭고 남들까지도 혼란스럽게 만드니 덜 행복한지는 몰라도(요한 20: 30), 지적인 본성이 강한 토마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과 인식론적 반성(목사님께서 지식이라고 표현하신)은 무엇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별개의 사고현상이라는 것이 아직까지의 제 생각입니다. 종교적 신념은 사실여부의 검증(verification)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실검증을 필요로 한다면 이 땅 위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는 성립자체가 불가능 할 것입니다.  반면 인간 자신과 자신을 둘러 싼 환경을 인식하는 도구인 과학은 검증의 엄밀성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합니다.

 

성서가 비과학적이므로 무용하다는 일부 안티기독교의 주장이나 성서에 이러이러한 말씀이 있으므로 무신론은 잘못됐다는 열성신자의 전도가 똑같이 설득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부 안티기독교나 기독교 근본주의나 종교적 고백과 과학적 검증을 혼동하고 서로에게 적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사고를 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 활동을 하시는 분들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증명을 과학적 검증을 통해 하겠다는 것이 이 분들의 목적인 듯 한데, 아직까지는 주로 진화론의 허점을 파헤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설령 진화론이 폐기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증명으로 연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의 존재증명은 과학의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목사님의 말씀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그 분들 중 적어도 과학자들이라면 종교적 신념을 빙자해 스스로 학문적 기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분들이 여기에 대해 죄책감이 없는 것은 그분들의 종교적 신념이 과학자의 윤리적 기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믿음과 지식의 구별은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회심에 대한 글에 대해서는 제가 스스로 지적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만 44세에 불과한 제가 일면식도 없는 87 세의 한 분야 거장의 내면세계의 어떤 변화에 대해 충분한 근거자료 없이 인터뷰 기사 몇 줄에 의존하여 재단했다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었음을 인정합니다. 특히 제목을 과거를 반성하는 법으로 뽑은 것은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프로파겐다 성 제목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Pilgrim’s Progress’라는, 은근히 조롱을 내포하는 제목을 단 인터뷰 기자의 취재의도 까지를 염두에 두고 다른 자료들과 후속기사들을 취합하여 좀 더 깊은 내용으로 다루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레이엄 목사의 회심정도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간의 결별현상을 반영하는 종파적 전향이라기 보다는, 제 글에 답글을 다신 신솔문 목사님의 견해대로 교리수립의 환경을 인식하는 신앙적, 신학적 통찰이 그윽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 현재 저의 솔직한 판단입니다.                  

 

짤막하게 감사 인사만 드릴 생각으로 모니터 앞에 앉았는데 또 말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연배에 관계없이 결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하긴 제가 결론을 가지고 살았던 때가 있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요란하고 기가 막혔던1980 년대 초 제가 20 대 초반 때로 기억합니다. 제 경우를 돌이켜보면 그 때가 不惑이었고 오히려 지금 더 이리 저리 흔들리고 헷갈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만히 보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그때보다 참을성까지 더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것 역시 가치관 수립의 환경을 인식하는 나름대로의 통찰이 심오해 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성장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앞 글 때문에 농담처럼 돼 버렸는데 진담입니다)’  

 

목사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은 워드로 따로 보관해 두고두고 생각을 가다듬는 자료로 삼겠습니다. 항상 평안하시고 소중한 선교의 열매를 맺기를 기원 드립니다.

 

2006 8 21 (한국시간)

 

강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