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쟁이들과의 대화록

민경신 목사님께

sarnia 2006. 9. 4. 06:14

민경신 목사님께 (2006 년 7 월 16 일)

 

먼저 9.11 의혹에 대해서 입니다. 제 글의 주제는 아니었지만 제가 인용했고 여기에 대해 가장 먼저 비중 있게 지적하셨으니 답변하겠습니다.

9. 11은 어느 쪽으로든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사건과 관련된 수 많은 세부사항들간에 연결고리가 실종됐을 뿐 아니라 정황자체가 복잡한 시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혹에 대한 조사와 해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부 유럽언론들이나 Loose Change樗?주장하고 있는 ‘자작극론’과 같은 정치공세적 결론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외부의 테러공격이 이 사건의 기본골격이라는 전제아래, 미국 집권세력의 이너써클이 사전에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과 사건 전후에 각각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을 밝혀내는 일입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의 숨겨져 온 진실과 함께 미국측의 관련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대강이라도 알아낼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90 년 8 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였던 April Glaspie 와 1949 년 국무장관 에치슨의 역할은 공개성 여부만 다를 뿐 본질상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Let’em do it’ 은 정보와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강자만이 활용할 수 있는 저강도 유인전략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보수집과 분석 판단능력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막강한 두 나라 정보기관들의 협조수준은 각각 다른 두 주권국가의 그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긴밀하게 밀착돼 있습니다. 조지 터넷 CIA Derector가 모사드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정보는 과장된 ?아니라는 ?저널리스트들의 일반적인 판단입니다. 파키스탄 무샤라프의 정보기관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9.11 공격을 미국 정보기관이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서 당했다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믿고 싶은 것’ 과 믿는 것’을 혼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건 직후 사전 정보가 있었다는 럼스펠드의 실언(?)으로 국방부의 실무진들이 라이스 안보보좌관(현 국무장관)을 비롯한 백악관 측으로부터 대 곤욕을 치른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 음모를 묵인하거나 추진할)무자비한 정치가가 오늘날 존재하겠느냐는 님의 의문에 대한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개인을 움직이는 것은 상식과 양심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권력을 장악한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조직의 보존논리와 명분입니다. 일반적인 잣대로 생각하기에 부도덕한 Mission을 수행해야 할 경우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명분이 소속된 개인들의 도덕적 저항감을 극복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례는 세계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황당하다’ 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 개인 과 거대조직의 보존논리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판단에 관한 잣대의 차이에서 오는 정서적 괴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9.11이 제 지난 번 제 글의 주제도 아니고 결론을 낼 만큼 판단 자료가 충분한 것도 아니지만 문제제기에 답은 드려야 할 것 같아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분야입니다.

다음은 선교에 관해서입니다. 님께서 ‘선교의 다양한 길’ 이라는 Tolerance 개념을 도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님과 저 사이에 견해차이가 많이 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를 반론의 주제로 삼아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선교에 대한 ‘초신자’로서의 제 소박한 견해를 말씀 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려 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올린 제 글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충분히 밝힌 바 있고, 더 이상의 논쟁이 자칫 소모적인 Polemical Arguments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 한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논리로 ‘선교의 기본’이 반드시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과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 교리나 계시를 비기독교인들에게 전도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3개국 국민들은 대부분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예수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다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의 자연사랑실천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톡홀롬이나 오슬로의 길거리를 메우고 있는 자전거 행렬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사소해 보이는 하나의 예이지만 저는 이 사람들이 일요일 마다 교회에 가기 위해 SUV를 끌고 나와 맨하튼의 트래픽 속에서 Gas를 낭비하고 있는 뉴욕의 일부 기독교인들보다는 좀 더 ‘예수를 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일요일마다 수 천 명씩 공개된 장소에 모여 “미국은 하나님이 건설한 나라”라고 외치며 문화갈등을 선동하는 전자부흥사들의 구호아래 비장한 단조 군가 풍의 ‘God Bless America”를 소리높여 합창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예수를 닮은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인 제가 이런 거부감을 느끼는데 비기독교인들이나, 특히 가뜩이나 위축돼 있는 아랍계 미국인들의 심정이 어떨지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자의 종교적 체험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전통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관용과 존중의 바탕 위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를 자문해 본다면 그 답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비기독교인들도 각자의 삶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소중한 믿음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은혜’를 나누고 싶다면 거꾸로 그들이 우리에게 나누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고, 자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본 뒤 이야기를 꺼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한 가나안 여자에게 유대인다운 인종주의적 편견을 노출하다가 그 이방여인의 겸손함과 진실됨 앞에 스스로 잘못을 깨우치고 뉘우친 적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천대했던 자의 어떤 모습에서 교훈을 받고 스스로 잘못을 발견하고 공개적으로 뉘우치는 이런 용기야 말로 예수를 그답게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을 아직 무엇을 깨닫지 못한 개종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그들 각자마다의 사고 단계에 맞는 전도작전을 구사한다는 식의 오만한 마음을 갖는 것은 전도자나 피 전도자 양쪽 모두를 위해 올바른 접근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Warren목사가 가진 장점과 나름대로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격적 선교에 대해 제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