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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보는 법

sarnia 2005. 10. 3. 09:01

글 : 강 현 (에드몬톤 교민)
지금 미국은 종교전쟁 중이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이다. 일부 신학자와 종교지도자들에게 대본이 공개될때 부터 성서해석과 반유대주의 조장 문제 등을 둘러싼 종교단체들간의 싸움박질로 시끄럽더니 이제는 영화를 본 관객들까지 이 논쟁에 휘말리고 있는 형국이다. 종교영화로는 드물게 블록버스터급 대박을 터뜨린 이유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받은 일반 영화팬들이 대거 극장으로 몰려든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곧 개봉될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캐나다 동포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것을 반영하듯 CN드림 3월 5일자에는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한 편의 영화' 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이 실린 바 있다. 평론에서 필자는 "대체로 균형잡힌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유대주의음모론으로 보는 시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 전제한 뒤 "시종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를 배제하고 사건이 3인칭 관찰자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며 이 영화에 대한 우려와 논란이 너무 지나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같은 견해는 비단 위의 평론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일부 보수언론에서도 보여진다. 트집잡기가 주특기인 미국의 매체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관대하게도 '영화는 그저 영화로만 보자'며 이 위험한 논쟁의 불길이 확산되는것을 막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이 작품의 영화외적 이슈들이 깆는 뇌관의 폭발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작자겸 감독 맬 깁슨의 인생역정과 종교적 배경은 고구마줄기처럼 엮여있는 '영화외적 이XX들과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아버지는 "2차대전중 나치의 유대인학살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을 최근까지 굽히지 않고 있는 극우적 인물이다. 그는 1962년 제 2차 바티칸 공회 이래 카톨릭이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진보적 입장에 대해 강한 거부의사를 표시해 왔다. 알려진 대로 제 2차 바티칸 공회에서는 다른 종교와의 화해를 선포했고 유대인 박해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다. 이같은 입장은 최근 교황에 의해 재천명되기도 했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의 음모라고 몰아부쳤다. 그의 아들 멜 깁슨은 그가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던 7-80년대를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저주의 세월이었음을 고백하고 철저한 근본주의자로 다시 태어난 뒤 극우보수파인 그의 아버지와 영적으로 재결합했다고 고백한 인물이다. 종교간의 화해라든가 동성결혼 인정, 사형제도 폐지, 이런 개념들에 대해 극도의 증오감을 품고 있는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거듭났다고 주장한 그가 그의 사재 2천 5백만불을 털어 그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예수가 누구에게 잡혀 어떻게 죽어갔는가라는 제한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잔혹한 폭력과 피비린내 나는 체형장면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간 관객들조차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부 평론가들은 (감독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중립을 지키려 애썼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과연 그런가?
신약성서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으면서 영화를 주의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조연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한 사람은 유럽인이고 다른 두 사람은 유대인이다. 유럽인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을 식민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다. 영화에서 그는 기본적인 양심과 사고력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이다. 비록 더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문책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소심한 관리이지만 그 정도의 우유부단함은 사려깊게 고뇌하는 모습으로 충분히 커버될 수 있는 단점이다. 동족에게 고발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온 예수에게 안쓰러운 눈길로 물잔을 건네는 자비심도 갖고 있고 "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이든 말해보라"며 오히려 예수에게 애원하는 감동적인 모습도 보일 줄 아는 인물이다. 떼거리로 몰려와서 어거지를 부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등쌀에 마지못해 예수를 형장으로 보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잘못된 결정을 자책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는 양심있고 공정한 관리일 뿐이다. 반면에 예수의 동족인 두 사람의 유대인은 둘 다 기본 품성부터가 비뚤어진! 못 된 인간들이다. 한 사람은 대 사제 가야파이고 또 한 사람은 유대왕 헤로드이다. 그러니까 이 두사람은 유대인을 종교적 정치적으로 각각 대표하는 지도자들인 셈이다. 영화에서 가야파가 맨 먼저 한 일은 예수의 제자들 중 한명을 돈으로 매수해 그가 지금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는 이 동족 젊은이를 잡아 죽이기 위해 외국인 점령자들에게 아부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그는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여야하는 이유랍시고 횡설수설 주워섬기다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옆에 있던 다른 사제에게 곁눈질하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는 왜 예수를 체포해 끌고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한 논리적 설명도 할 능력이 없는 형편없는 돌대가리다. 이 따위 인물을 대사제로 떠받들고 있는 그 당시 유대인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인종이었느냐는 느낌을 찰나적으로 스치게 한다.
유대왕 헤로드는 가야파보다 한 술 더 뜬다. 우선 생김새나 차림새부터가 점입가경이다. 마약쟁이들이 우글거리는 삼류 스트립바에서 튀어나온 히피건달스타일의 그는 아예 자신의 직무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주지육림에 둘러싸여 미치광이같은 변태놀음이나 즐기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가 예수에게 서둘러 '죄가 없음'을 선언한 것도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침부터 찾아와 귀찮게 굴고 있는 가야파의 똘마니들을 빨리 쫓아버리기 위해서다.
신약 루가복음을 보면 '서로 반목하던 빌라도와 헤로드가 예수사건 이후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라도는 헤로드와의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관할구역을 핑계로 마침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던 헤로드에게 예수를 보냄으로써 헤로드의 권위도 인정해 주면서 골치아픈 예수문제도 함께 해결해보려는 일석이조를 노렸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영화는 여러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모두 배제한 채 두 유대인 지도자를 파렴치함과 비겁함 그리고 무책임함이 서로 범벅이 된 인간말종으로 묘사한다. 영화 초반에 다 잡아놓은 이 '한 유럽인과 두 유대인'에 대한 편견의 위력은 이후 전개되는 예수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폭력의 과정에서 슬그머니 발휘된다. 갈고리 채찍에서부터 손발에 못을 밖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 옆구리에 창을 꽂아 체액이 쏟아져나오는 순간까지 대부분의 폭력은 빌라도의 부하들에 의해 행해지지만 이상하게도 관객들의 분노는 대사제 가야파와 총독관저에 몰려와 '예수의 죽음'을 외쳐댔던 유대인 군중들에게 가서 꽂힌다. 혹시 관객들의 분노의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도록 폭력의 적절한 고비마다 빌라도가 파견한 '걱정스러운 표정'의 로마관리가 부하들을 제지하는 장면을 넣는 배려 또한 감독은 잊지 않았다. 또 관객들이 끝까지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가야파를 중간에 잊기라도 할까봐 그랬는지 모든 중요한 폭력의 장면에 그를 구경꾼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대세가 완전히 기운 마당에 끝머리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착한 유대인(예수에게 물잔을 건네는 여인과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이 이 영화를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작품으로 다시 이끌기에는 지나치게 역부족이었다. 특히 키레네 사람 시몬은 대신 지고 가던 십자가를 내팽개치고 '폭력을 중단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원작(신약성서)'에도 없는 '오버'를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멜 깁슨과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는 성서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영상화한 더큐멘터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증학적 검증을 거친 역사사료가 아닌 신약성서를 옮겨놓은 이 작품을 더큐멘터리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거니와 '문자 그대로'라는 말이 얼마나 불가능하고 허구적인 개념인가는 영화 곳곳에 예수몸에 난 채찍자국처럼 드러나 있는 감독의 주관의 흔적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그리스도의 수난'은 반유대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정서적으로 더욱 강하게 결집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부상을 위험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적독선과 광신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일깨워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어쩌면 이 두 세력간의 세기의 결전장이 될지도 모를 미국 대선을 몇 달 앞두고 불쑥 튀어나온 이 영화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의혹과 우려가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의 기우로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sarnia@hanmail.net


편집자 주) 본 글은 CN드림 2004년 3/1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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