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를 통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 부터 세계 주류 대학의 신학과와 종교학과의 강의실, 그리고 연구기관 등에서는 이런 담론들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여왔다. 담론의 주제는 소설보다 더 심각하고 다양하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 예수의 생부(生父)와 탄생지 추적, 예수와 제자 요한 간의 동성애 관계, 예수의 사상이나 행동과는 전혀 성향을 달리하는 사도 바울로의 정체, 그리고 그런 그의 편지들이 뒤늦게 신약에 끼워 넣어진 이유, 원래 남녀 양성동체였던 야훼가 남성신(男性神)으로 둔갑한 배경, 초기 및 중세교회의 신·구약 문서 선택 기준,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되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 ‘공식권력’으로 등장한 기독교가 이후 1천 수 백년 간에 걸쳐 저지른 온갖 종류의 사기극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잔혹한 폭력의 역사 등 민감하고도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이런 담론들 중의 일부를 추리소설 장르를 빌어 다루고 있는 ‘다빈치 코드’가 출간된 지 1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이제까지 주로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회자되어 온 이런 토론 주제들이 기록적인 판매부수를 올리고 있는 이 소설을 매개로 일반 대중에게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를 계기로 하여 그동안 대부분의 일반 기독교 대중이 접근하지 못했던 종교사적 연구결과와 토론주제들이 봇물이 터지듯 철조망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보고 공포에 휩싸인 일부 보! 수적인 교회들이 노발대발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분노’를 선동하고 있는 일부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과 신학자 등 이른 바 보수진영의 전문가 집단이 보이고 있는 떳떳하지 못한 대응 자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런 담론들을 난생 처음 접했다는 듯이 혼비백산한 척 하며 작가에게 저주를 퍼 붓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의문’ 등 작가가 제기하고 있는 핵심 문제들에 대해 논리적인 반론을 펴는 대신, 대부분 자질구레한 일부 사실 묘사에 대한 잘못이나 모호함을 트집 잡아 작가와 소설의 신뢰성을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돼 있다는 이야기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한 가톨릭 사제는 “(작가가)한 때 교황들이 아비뇽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비난하며 “이런 무식한 작가가 쓴 소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감정적인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아마 이 한국인 신부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세력이 지나치게 막강해 진 탬플의 기사들(The Knights Templar)을 제압하는 이야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교황의 궁전을 ‘아비뇽’이 아닌 ‘바티칸’으로 표기한 것을 트집잡은 모양이나 교황의 궁전이 아비뇽으로 이사한 것은 1309년의 일이고 ‘탬플의 기사들’ 사건은 소설의 묘사대로라면 1307년(1312년이라는 설도 있다)이므로 작가가 잘못 표기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황의 궁전이 아비뇽에 있었건 바티칸에 있었건 교회권력의 대명사로서 바티칸으로 표기한 것은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필자 주: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는 교황에 즉위한 뒤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압력으로 교황의 궁전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긴다. 이후 교황들은 1377년까지 이곳에 머물게 되는데, 그 후 바티칸에서 선출한 교황과 아비뇽에서 선출한 교황이 서로 자기가 교 황이라고 우기는 추태를 벌임으로써 중세 교회권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도 이 신부는 정작 ‘예수의 신성’등 핵심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반론도 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입에 담기조차 두려워서였을까?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 권력이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에 적합한 문서들만 취사선택하여 신약을 편집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이 문서들의 내용 중에는 사실의 진위여부를 결정적으로 의심케 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예수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로는 루가복음이 그 중 으뜸이다. 루가복음 2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조사령을 내린다…중략…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 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후략.” 로마사의 관계 문헌들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 원년에서 4년 사이에 호구조사는 없었다. 퀴리노는 기원 후 6년에야 시리아 총독에 부임했다. 설령 호구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임신한 마리아가 나자렛에서 예루살렘 근처인 베들레헴까지 왕복 3백 5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는 말이다. 결국 루가복음은 예수를 다윗왕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처럼 만들기 위해 그럴 듯 하게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다. 이에 비하면 마태오복음의 거짓말은 한결 순박하다. 마태오복음은 아예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낳은 뒤 이집트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마을인 나자렛으로 이사를 갔다는 내용의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연인관계였고 결혼까지 했다는 주장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캐나다 최대 개신교단인 연합교단(The United Church of Canada)의 총회장을 지냈던 빌 핍스는 그의 저서 ‘Was Jesus Married?’에서 두 사람이 부부사이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남자가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예수의 언행이나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 등으로 미루어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예수의 성적(性的)성향에 대한 일부 신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의 주장은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다. 요한복음(21:20)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그 상대이며 예수는 이 미소년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오른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든 미소년 요한이든, 다빈치의 작품은 이 두 사람(예수와 마리아 또는 요한)이 매우 특별한 관계였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연구와 토론의 대상에는 금단의 성역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게 할 수도 없다. 어차피 종교적 믿음과 역사적 사실은 서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결하기가 어려운 서로 다른 영역이다. 신·구약에 기록된 내용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개인의 종교적 믿음이 훼손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신·구약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만 올바른 믿음이라는 고집은 자신을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분명한 것은, 평평하던 지구가 갑자기 둥글게 변해 태양의 주위를 돌기시작한 이후에도 교회는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현 (sarnia@hanmail.net)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4/22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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