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입니다. 열린 카페에서 음악하나 가져왔습니다. 12 월 25 일이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날짜는 아니지만 앞으로 '헌법절차'에 따라 어떤 변경이 있을 때 까지는 이 날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도 별 문제 없을 것 입니다.
오늘은 평신도들끼리만 모여 이야기 합시다. 이런 이야기 앞으로도 종종 했으면 좋겠구요.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 아니라 설화라는 것을 새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많은 것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 평신도들은 공부할 수 있는 여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천천히 합시다.
신학은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인 이상 누구나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평신도가 신학이나 종교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목적은 현장 교역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2000 년 신앙전통과 교리가 혁명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시기에 실족하지 않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0 년 신앙전통과 교리가 송두리째 뒤집어 질 도전의 출발은 1945 년 이집트의 한 농촌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13 개 뭉치 52 종의 파피루스 기록이 발견된 것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로부터 2 년 뒤인 1947 년 발견된 Dead Sea Scrolls (사해문서)와 함께 성서학에 있어서 혁명적 변화를 예고해 줍니다. 이 연구의 중심에는 하바드 신학대학원 (Harvard Divinity School), 클레오몽트 대학원 (Claremont Graduate School), 그리고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 등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 단체 모두 서구 기독교 중 근본주의자를 따르는 신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약 7%) 미국에 소재하고 있는 아카데미 집단입니다. 이 중 예수 세미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단체는 대학이 아닌 민간연구단체로서 성서비평학과 영지주의 연구에 활발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구 교회들은 현재 기독교 신앙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 의해 채택된 성서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케리그마, 즉 교리가 더 이상 신앙의 근본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케리그마보다는 예수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신자의 내면에서 깨우침을 얻어나가는 데로 신앙의 중심을 옮겨가고 있다는 것 입니다. 집단적 통제가 아닌 개인의 자유롭고 진지한 깨우침이 종교성의 참된 본질이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의 주류교회들은 이미 사도신경을 폐한 지 오래입니다. 캐나다 연합교회만 하더라도 오래 전에 교회에서 사도신경이 사라졌습니다. 새 문헌의 발견과 고고학적 연구결과는 우리가 지금까지 신주처럼 모셔오던 온갖 고백들을 모조리 변경시켜야 하는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릅니다. 신학자들과 문헌학자들은 새 문서들 중 도마복음은 이미 4 복음서와 함께 5 복음서로 명칭을 변경 분류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말이 외경이지 정경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도마복음 이야기 또 나오자마자 혈압 올라가는 분들이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 평신도들로서는 날밤을 세워야 할 벅찬 주제일 것 입니다.
한마디만 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정통을 부정하는 모든 새 이론들은 모두 이단이다라고 정죄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이제 보니 모든 정통은 깡그리 거짓말이었다고 역부정하는 자세일 것 입니다. 양쪽 모두 신앙인의 자세라기 보다는 정치적 당파에 속한 싸움꾼의 자세에 불과합니다. 이런 싸움꾼의 자세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 게시판이 자주 난장판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적 당파성을 토대로 한 싸움꾼이 아니라 진지한 평신도로서 분명히 말 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육체적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정녀 탄생과 육체적 부활이 문학적 메타포로 남아 있을 때 한 종교의 훌륭한 신화적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화적 의미가 신앙외적인 불순한 정치집단에 의해 뚱딴지같이 역사적 사실로 둔갑하고 그것을 피지배집단에게 무조건 믿기를 강요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아름다운 신화가 아니라 허튼 소리로 둔갑합니다. 저는 그런 허튼 소리까지 제 신앙의 한 테마로 삼아야할 하등의 이유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자연의 기본 원리를 신앙 안에서 이해하는데 칼 바르트의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해야 할 큼 학구적으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창조했다면 그것은 ‘창조비행’에 속하는 행위일 것 입니다.
즐거운 성탄 각자 의미대로 보내시고 다음에 만날 땐 조금씩 풀린 표정으로 만나서 격조 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부탁 드리는 건데 이야기를 할 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말 할 때도 화를 안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글 쓰면서 화를 내다니, 말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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