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가져온 폐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쓸데없는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하고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정결제도’일 것 입니다. 이 정결제도란 그 제도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특권과 종교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해 보려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십계명을 자기들 멋대로 6 백 여가지가 넘는 세분화된 율법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핍박했던 옛날 유대교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율법을 만든 사람들은 주로 재수 좋게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노동할 필요가 없어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쓸데없는 개똥 같은 생각이라도 시간 많고 할 일없는 작자들이 모여 앉아 쓸고 닦고 하다 보면 그럴 싸 한 철학으로 변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둔갑한 그럴 싸 한 이데올로기나 철학이 한 시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기기도 하고 옥죄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게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입니다. 유대교의 정결제도 역시 당시 인문 종교학이 낳은 어둠의 자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런 사람 잡는 개똥철학의 일종인 ‘정결제도’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그것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던 당시 특권세력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분입니다. 그 불합리한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반인간적 사상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지요.
웃기는 것은 유독 한국 교회에만 팽배해 있는 음주 흡연에 대한 금기문화란 것은 별로 그럴 싸 한 철학에 바탕을 둔 문화도 아니고, 그저 속이 좁아터진 미국 근본주의 진영 선교사들이 자기 생각을 강요한 편견에 불과한 것인데,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종교가 어떤 사람의 언행에 대해 굳이 옳고 그름을 나누고 싶다면 그 기준은 좀 더 종교답고 설득력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예를 들면, 과연 그 사람이 정직한가, 어느 정도의 용기와 정의감을 가지고 자기 나름의 기준대로 비겁하지 않게 사는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 시간이나 물질을 다소 희생하고서라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가, 불의한 일을 보면 자기가 좀 피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가 등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게 아니고 고작, 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가 껌을 씹는가, 안식일에 외출할 때는 5 리를 가다가 앉아있을 의자를 들고 나가는가, 지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친구가 담배 한 대 권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며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가 안 지르고 받아 피우는가, 어떤 교회에서 성찬식에 사용하는 게 와인인가 포도주스인가 따위를 가지고 교역자나 장로의 자격을 평가한다면 얼마나 괴상하고 우스운 일이겠습니까?
예수가 중학교 기숙사 사감 노릇이나 하려고 이 땅에 왔다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음주 흡연 문제가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않겠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시간낭비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가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술을 조달하는 것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예수 자신의 능력에 의존할까봐 ‘기적에 대한 보안’을 그렇게 강조했던 예수가 자신의 결혼식이 거의 분명한 가나의 혼인잔치 때는 그렇게 신속하고도 공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한 걸로 봐서 예수 역시 ‘뭔가 좀 아는 애주가’ 아니었겠느냐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지요.
술은 제가 즐기지 않는 편이라 잘 모르겠고, 담배는 지금은 안 피우지만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피우다가 끊은 적이 있어, 끊기가 매우 고통스러운 기호품이라는 걸 잘 압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전에 소개 드린 적이 있는 ‘라운드리 사건’ 때문에 화가 나서 한 번에 끊어버렸는데, 그때 겪은 고통은 참 지독하고도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잘은 몰라도 아마 ‘출산의 고통’이 지금의 내 고통과 비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반가운 친구들과 어울릴 때 가볍게 한 잔 하고 머리 아플 때 담배 한 대 피워 무는 네 놈은 김국도 목사나 이근안 목사보다도 더 나쁜 놈이니라” 하고 계시를 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출산의 고통을 견디며 술 담배를 끊어본 경험이 있는 교인이라면 자신 있게 교역자의 음주 흡연 문제를 지적하세요.
자기가 겪어 본 일이 아니라면 쉽게 이래라 저래라 할 일 아니구요. 겪어 본 일이더라도 그냥 사생활의 범주에 속하는 사소한 일이라면 언급하지 않는 게 더 좋겠죠?
술과 담배가 가져오는 사회적 비용(특히 의료분야의)이 문제라면 그 문제를 주제로 음주 흡연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음주 흡연 문제를 교역자의 자질문제와 연결시키는 건 어쩐지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군요.
이상은 윤00 님의 사연에 대한 강현 님의 의견이었는데요. 이야기와 함께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는 사랑의 하모니가 부르는 ‘별이여 사랑이여’ 였습니다.
몇 달 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게시판에 올렸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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