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는 친일작곡가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애국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가 친일작곡가여서가 아니다. 그런 진부하고 새삼스러운 사실은 전혀 내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어차피 해방 후 피치 못해 대한민국에서 살기로 작정한 당대의 지식인 거의 전부가 그 기록을 읽기도 낮 뜨거운 노골적인 부역행위를 했다는데, 그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인물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현재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는 어느 유명한 경제학자 출신이다. 그는 국회답변에서 731 부대를 항일 독립군 부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처음 이 기사를 읽었을 때, 그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은 야당의원이 밉살스러운 나머지 엿이나 먹으라는 의도에서 이런 대답을 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진짜 그런 줄 알고 그렇게 대답한 모양이다. 텔아비브 국립대학 총장 출신의 이스라엘 총리가 지금까지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지역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유대인 비밀 유격부대 캠프인 줄 알았다”는 답변을 했다고 가정하면 아마 이에 필적할 만 한 답변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총리로 앉아있는 이런 나라의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친일 전력이 있다는 건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안익태의 친일행위는 그 개인적인 족적에 비추어 볼 때 별로 중요한 활동도 아니다. 그는 미국에서 잠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일본 시민권의 보증을 기반으로 동맹국 나치 독일과 나치의 점령지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하면서 틈틈이 중국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만주국 축전’을 작곡하고 직접 지휘하는 부업을 한 것이 문제가 돼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올라간 모양이지만 그의 친일이야 말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충성스럽고 눈물겨운 훌륭한 친일로 보였을 것이다. 외국에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잠시 쉬는 틈을 허비하지 않고 멸사봉공한 틈새 친일이기 때문이다.
안익태의 절친한 후원자이자 스승이기도 한 Richard Strauss 라는 유명한 음악가의 스토리를 읽어보면 눈물깨나 찍어내야 할 만큼 곡절이 많다. 그는 오스카 쉰들러 만큼이나 나치 상층부에 절친한 친구들이 많은 아주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 학살의 정당성을 문화이론화해서 대중을 설득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괴벨스 박사와 연분이 두터웠다. Strauss는 당시 Ministry of Propaganda라는 요상한 이름의 부서 장관을 하던 이 궤벨스 선생에 의해 나치의 국립 음악기관 총재 (President of the Reichsmusikkammer, the State Music Bureau)로 발탁되기도 한다. Strauss의 눈물겨운 스토리라는 건 나치 치하에서는 별 소리 없다가 주로 패전 이후에 그의 입을 통해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인데, Alice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며느리가 유대인이라 그녀와 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서 적극적인 친 나치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다.
30 대 시절 안익태는 궤벨스 박사의 soul brother 이기도 한 눈물의 곡절 Straus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스와스티커 깃발들이 가로로 세로로 장중하게 걸려 있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키스트라와 Grosser Rundfunk-Orchester Berlin (나치의 선전용 관현악단) 에서 신 들린듯이, 미친듯이 유감없이 지휘실력을 발휘했다. 이 때가 1940 년, 이미 5 년 전 선포된 뉘른베르크 인종분리법을 근거로 유대인과 집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집단 대학살의 서막이 울리던 바로 그 해에 있었던 일이다.
안익태는 1943 년부터 1 년 여 간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활동하다가 1944 년 연합군과 레지스탕스에 의해 파리가 해방되자 강제추방 당한다. 당시 해방된 프랑스의 분위기에서는 나치부역자로 체포즉시 현장에서 사살될 수도 있었는데, 잡아 놓고 보니 동양에서 온 외국인인데다가 나치 신봉자 같지는 않고, 그냥 음악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나치 치하든 스탈린 치하든 지휘봉을 흔들어 댈 준비가 돼 있는 골이 빈 재주꾼 정도로 생각을 해서 그냥 석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니까 확언할 순 없지만 세계인이 다 보는 백과사전에 나온 다음과 같은 쪽 팔린 문장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Ahn found another place to work, the Orchestre de Paris, but he was forced to leave in 1944, when Paris was liberated from the German forces. He was invited by the Spanish ambassador to conduct for the Orquestra Simfonica de Barcelona.
그러고 보니 파리에서 쫓겨나 바르셀로나로 가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운명적 사건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반려자가 될 Talavera Lolita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천재 음악가였을 뿐이다. 어떤 때는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도 보인 적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지성을 가진 조선인, 그리고 한국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평범한 지성이 감당하기에는 그의 재주가 너무 비범했다는 게 탈이었다. 그뿐이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다만 그가 그 시대에 그런 활동을 하면서 작곡한 그 곡을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윤리적 정당성을 담보하고 대표하는 ‘애국가’로 삼을 수 있느냐는 게 문제다.
석 달 후면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며칠 시간을 내서 밴쿠버에 갈 계획인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역시 미리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날 어느 스케이트 링크에서는 시상식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 질 것이고 그 소녀는 또 가슴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역사에 관심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편으론 의아해하면서 한편으론 착잡한 마음이 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근 거릴지도 모른다.
“금메달을 받은 저 선수의 나라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은 옛날에 제국 일본의 황국신민으로서 서유럽에서 나치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이래”
“그런데 저 선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의 부역행위가 친일에만 한정된다면 우리끼리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부역행위는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아주 거창한 것이다. 그는 특별히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닌데 시대를 잘못 만나고, 그 평범한 인격에 비해 지나치게 비범한 재주를 잘못 타고 난 죄로 우리 모두가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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