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가을여행 보고서

가을여행 보고서 3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sarnia 2009. 10. 27. 11:17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를 하루 땡땡이치고 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다. 부산에 갔었다. 당시 서면에서 고종사촌 누나(나보다 아주 나이가 많은)가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거길 찾아갔던 것은 아니고 그냥 기차를 타보고 싶어서 무작정 갔던 것 같다.    

 

부산에는 아직 이런 골목길이 많이 남아있다.  

 

부산에 그렇게 많이 놀러 갔어도, 심지어 부산에서 2 6 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는데도 해운대를 찾은 적은 별로 많지 않다. 이번에는 해운대에 가 보았다. 뜬금없이 그 근처에 있는 추리문학관을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해운대를 가 본 게 1989 년 봄 이었으니 꼭 20 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해변을 따라 고층건물이 늘어서 있는 것이 호놀루루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봄에 부산에 몇 번 내려갔던 이유는, 시위 도중 경찰에 쫓기다 머리를 크게 다쳐 뇌사상태로 봉생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여학생을 취재하고 그의 부모를 면담하기 위해서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여학생의 이름은 이경현이고 당시 부산교육대학을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해운대와 송정 사이 달맞이 고개 언덕위에 자리잡은 추리문학관

 

추리작가 김성종 씨의 작품 중에는 부산, 그 중에서도 해운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국제열차 살인사건의 주인공 추동림과 남화는 해운대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가난한 어부의 맏딸 백색인간의 홍난미의 집은 송정에 있었다. 그녀는 섣달 그믐날 밤 부산으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만났던 남자 주인공 서남표와 해운대의 한 호텔에서 재회해 운명의 관계를 맺는다.

 

나는 아직도 제 5 열의 주인공이 최진인지 다비드 킴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원조할매집의 국밥은 변함이 없다. 옛날에 비해 매운 기가 좀 가신 것 같기도 하고……

 

박차정 여사의 생가는 동래에 있었다. 이틀 전 밀양에 갔을 때 그의 묘소를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산에 온 김에 대신 그의 생가를 찾은 것이다.

 

내가 본 안내문에는 박차정 여사의 생가를 가려면 지하철 동래역 2 번 출구로 나와 대동병원과 동래고등학교 사이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안내문이 완전히 엉터리라는 걸 현지에 와 보고서야 알았다. 대동병원에서 동래고등학교까지는 무려 1 킬로미터 가량 되는 거리였고, 그 사이에 골목길이 수 십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길가던 30 대 사내에게 혹시 박차정 여사의 생가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 사내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잘 모르겠는데예하고 대답했다. 잘 모르는 게 아니라 그런 이름은 난생 들어 본 적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어봤다. 그 아저씨는 혼잣말로 박차정박차정…’하고 생각을 더듬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되물어왔다.

 

이 동네 사는 사람인교?”

 

 

 

 

별로 시간낭비하지 않고 결국 찾기는 찾았다. 동래고등학교 버스 정류장 부근 골목에서 '박차정생가'라고 쓰여진 갈색 표지판을 발견한 것이다. 관람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생가 관리인은 어디 출타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좀 열어주이소" 하고 두 번이나 크게 외쳤는데도 개만 요란하게 짖어댈 뿐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국가검열상과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박차정 여사의 남편) 1958 년 당적을 박탈당하고 처벌된 이유는 그가 장개석의 스파이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할 당시 장개석의 재정적 후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은 역설적으로 김원봉의 청소한 연배와 진보적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이 그의 정치적 비중을 높게 평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더 큰 죄는 아마 그의 무장투쟁경력이나 지적인 논리정연함, 그리고 걸출한 인물됨이 김일성 당시 수상의 위상을 위협할 정도로 화려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김일성보다 무려 열 네 살이나 연상이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시작했을 때 김일성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나이로 보나 투쟁경력으로 보나 그는 한국전쟁 이후 완고해진 김일성 체제와 같이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박차정은 중국 중경에서 1944 년 사망했다. 5 년 전인 1939 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 여성 혁명가의 시신은 해방 이후 남편 김원봉에 의해 수습되어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된다.

 

 

내가 부산에 간 날은 마침 부산 국제영화제 폐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10 16 , 이 날은 공교롭게도 딱 30 년 전 부마항쟁이 시작된 바로 그 날이기도 하다.

 

 

지하철 자갈치 역 7 번 출구로 나오면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이 마주보는 지점으로 나오게 된다. 자갈치 시장은 2 년 만이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호객행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시장의 catchphrase 가 바뀌어 있었다. 과거에는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였는데 지금은 오이소, 보이소, 노이소. 자갈치 축제 기간이라 임시로 내건 건지 모르겠지만 똑똑한 변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