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는 아름답고 격조있는 도시다. 아마 조만간 이 도시를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태국에는 불교사원이 많다. 특히 란나 왕국의 수도였던 치앙마이 구 시가지 안에는 쌀국수식당 보다 고찰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도처에 널려있는 이 고찰들이 풍기는 분위기란 고리타분함이라던가 종교적 교조주의가 풍기는 악취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강요나 권위를 밖으로 들어내지 않는 문화와 일상생활의 일부로 표나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보관돼 있는 도이수텝으로 올라가는 300 계단. 나는 아직도 불가사의하다. 오른쪽 귀퉁이 용머리 아래 앉아있는 남매로 보이는 저 고산족 아이들을 나는 결단코 본 적이 없다. 이 상황을 기억하는 이유는 관광객들로 붐비던 계단입구가 천재일우의 기회처럼 사람들이 싹 사라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저 빨간 옷 입은 여자는 왜 빨리 안 내려오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없었던 두 고산족 남매가 사진에 나왔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지?
나는 줄곧 뒤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잇었다. 20 분 정도가 지난 후 두 신도의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 할 무렵 나는 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스님이 혹시 마네킹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차마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Zoom을 열었다.
내 종교배경은 기독교다. 외할아버지가 목사님이셨고 사촌 형(미국)과 와이프(캐나다)는 현직 목사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치앙마이의 고찰에 들어서면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예불을 드리는 신자들이나 설법을 하는 스님의 표정에서 천박함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은 요새는 바빠서 잘 가지 않지만 캐나다의 교회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마음의 안정과 같은 종류의 심리상태임을 깨달았다. 묵직하면서도 온화한 종교적 무게가 주는 안정감일 것이다. 온화함이나 관대함은 커녕 격조조차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의 상당수(일부가 아니다) 보수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도대체 그들의 종교적 체험 속에서 무엇을 배운 걸까?
이들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소통을 이야기하면 “관대해 보여야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는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 몰상식한 소리는 1950~60 년대 남부 시골마을의 KKK단원들이 당시 민권운동을 지지하던 언론매체와 대학, 연방정부 관리들을 향해 내뱉던 말이다.
이 날은 10 월 11 일 일요일이었다. 나는 치앙마이의 불교사원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예불을 드리는 서양인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좀 놀랐다. 나는 처음에 예불에 참가해 부처님께 절을 올린 저 서양 친구가 불교신자인 줄 알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독일에서 왔다는 이 사람은 투박한 영어발음으로 자기는 Christian 이라고 소개했다.
도이수텝 사원에서 내려다 본 치앙마이 전경
아무래도 관광지라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이야기를 더 나눌 수는 없었지만 아마 이 크리스챤 친구는 불교나라 태국에 와서는 현지식으로 법당에서 예불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주일 종교의식을 대신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유럽이나 캐나다에는 기독교에서 불교나 이슬람으로 개종을 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현각스님 같은 사람이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이 종교가 진리인 줄 알았는데 저 종교가 진리여서 개종했다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와 닫는 느낌이 더 강하고 설득력 있기 때문에 개종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개종을 했다면서 전에 자기가 가졌던 종교를 비난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전에 있던 곳에서 인간적인 마찰이 있었거나 돈을 떼어먹고 도망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종교적 깨달음에 바탕을 둔 개종이라면 다른 종교를 헐뜯을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조상이 하나(또는 아주 소수의)의 개체였듯,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종교의 뿌리도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나로써는 거의 ‘믿음’에 가까운데, 이런 형태의 종교적 통찰과 직관이 가능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다행스런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내 생각이고 의견일 뿐 이니까 아니라고 생각해도 할 말 없다.
하지만 싯다르타와 예수의 행적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은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냐 아니냐는 네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둘 다 실존인물이었다면 당연히 600 년 늦게 태어난 예수가 싯다르타의 행적에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30 대 초반에 독일의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individuation process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비슷하게 출가했으며, 비슷하게 세 차례에 걸친 물질적 정치적 종교적 유혹을 각각 받았는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비슷한 깨우침을 얻었다. 심지어 후대의 신봉자들이 지어냈거나 뭔가 기록을 오역해 만들어 낸 ‘여성단독출산신화’까지 비슷하다는 것은 두 종교문화권간의 역사적 교류사실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주는 방증(반증이 아니고) 아닐까.
나마스떼...... (내 안에 있는 초월적인 그 무엇이 당신 안에 있는 그 비슷한 존재에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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