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가을여행 보고서

치암마이, 그 도시는 여자들이 참 예쁘다 (가을여행 보고서 9)

sarnia 2009. 11. 14. 11:12

치앙마이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을 세 마디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길거리는 정갈하고 남자들은 순박하고 여자들은 예쁘다

 

이 중 여자들은 예쁘다는 다소 내 주관적인 느낌에 토를 달지 말기 바란다. 예쁘다고 느꼈으면 예쁘다고 정직하게 말해야 정상이지 처가식구들을 비롯한 주위사람들 눈치를 보느라고 딴 소리를 한다든가 시치미 뚝 떼고 있는 게 장한 일이겠는가? ‘

 

80년대 세대내면 안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그 위선적 교조의 잔재는 아직도 표현조차 자유롭게 못하고 이런 쓰잘떼기없는 사족을 달아야 불안한 마음이 약간 가실 정도로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    

 

호텔 객실에서 내려다 본 치앙마이 전경. 나는 매일 아침 6 시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객실로 돌아와 외출할 때까지 약 30 분 가량 창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무슨 명상 같은 걸 했다는 게 아니라, 오늘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곤 했다는 이야기다.    

 

 I would like to get money for…… study. “...... “가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학창시절 내 손으로 학비를벌어본 기억이라곤 꿈에서 조차 전혀 없는 나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약간 주눅이 들곤한다.  

 

일요일 저녁부터 밤 늦게 까지 치앙마이 구 시가지 안 리챠담넌 거리는 거대한 노천상가로 변한다. 선데이 마켓이 열리기 때문이다. 현지인 뿐 아니라 외국인 방문객들도 매주 한 번 열리는 이 도시축제 같은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몰려나온다. 10 시쯤 되면 동서로 약 2 km쯤 뻗어있는 리차담넌 거리일대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가득 메워진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선데이마켓뿐 아니라 치앙마이 어디에서도 한국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길거리 같은 공공장소에서 한국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기야 봤겠지.

 

 나를 호텔에서 선데이마켓이 열리는 리차담넌까지 태워다 준 툭툭 기사는 중학생. 열 네 살 난 소년이다.   

 

이 소녀의 해맑은 미소를 보라. 그는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남자와 함께 노점에서 소시지를 팔고 있었는데 줄곧 미소와 친절함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절 호객을 하는 법도 없었고 손님이 다가가서 값을 물어 본 뒤에야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도 되느냐고 묻자 포즈까지 취해준다. 

 

 

저녁 6 시 정각, 태국 국가가 연주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선 자세로 예의를 표한다. 인파 중 약 30 % 정도는 visible minority (일본인, 백인을 비롯한 비 동남아 계 외국인)이었는데, 이들도 같이 부동자세로 서서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지켜준다. 사실 이런 장면은 군사독재정권의 전체주의 망령이 뇌리 속에 남아 있는 우리 세대에게는 거부감을 가져다 줄만한 것이었는데 왠지 부정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주관적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요된 일상이라기 보다는 어느 정도 자발성이 그들의 표정과 자세에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태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여러 가지 옛날일 들이 떠 올랐다. 극장에서 애국가가 시작되면 궁시렁거리며 마지못해 일어나던 관객들, 아침조회 시간에 사절까지 이어지는 애국가를 부르며 “X, 추워 죽겠는데 이거 언제 끝나나하고 짜증냈던 순간들. 애국가를 부르는 학생들 사이 사이로 뱁새눈을 하고 돌아다니며 애국가 안 부르는 놈이 없나 교장 교감 보란 듯이 아첨하던, 그야말로 인격 수준이 의심되던 그 저능아 같은 교사들……  

 

나는 아마 짓궂은 호기심에 관한 한 특별한 유전적 형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슬렘 여인이 파는 노점 음식을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라는 게 고작 혹시 좌판 위에 있는 음식들 중 돼지고기를 비롯해서 코란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음식은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참, 철들려면 좀 더 기다려야겠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사실은 일본의 중국침략전쟁 상징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작곡하고 직접 지휘까지 한 대표적인 친일작곡가였다는 것, 게다가 그는 독일과 히틀러 점령하의 파리에서 나치협력활동까지 한 자라는 충격적이고도 슬픈 역사를 숙명처럼 안고 사는 2009 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과연 지금 이 순간의 태국 사람들처럼 진솔한 자발성으로 대한민국 애국가에 예의를 표할 수 있을까?       

 

이 깐뚝 소녀도 학비를 벌려고 나왔나? 내가 리차담넌을 서 너 번 왕복할 때 까지 몇 시간 동안을 같은 장소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 곳은 내가 세 번째 저녁식사를 사 먹은 노점이다.

 

나는 이 노점 앞에 차려진 노천 food court 에서 골든트라이앵글과 라오스 국경마을을 함께 누비고 다녔던 팀원 들 중 세 명을 우연히 다시 만나 무척 반갑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죠앤이라는 이름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여대생, 인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스위든에서 산다는 35 세 가량의 인도계 남자, 이탈리아 블로냐에서 왔다는 정년을 1 년 앞 둔 늙수그레한 의사.

 

사람의 동류의식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나이도 국적도 제 각각인 (20 , 30 , 40 , 60 ) 우리 네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10 년 지기처럼 다시 어울릴 수가 있었다. 우리 네 명은 모두 외국 오지를 여행하는 홀로 여행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팀 멤버들 중 나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2 개월 이상을 동남아 오지 일대를 배낭여행한다는 진정한 고수들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경기도 화성경찰서 강력반. 구반장(변희봉)이 박형사(송강호)에게 각각 피의자와 참고인 조서를 쓰고 있는 두 남자를 가리키며 누가 피의자이고 누가 참고인인지 알아 맞춰 보라고. 확률은 2 분의 1이지만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좀 더 어렵게 문제 하나 내겠다. 사진에 나오는 두 분 중 누가 형님이고 누가 누님일까? 좀 더 어려운 이유는 두 분 다 형님일 수도 있고 두 분 다 누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답을 맞출 확률은 2 분의 1 이 아니라 4 분의 1 이다.

 

트랜스젠더와 동성애는 다른 개념이지만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겠다.

 

내가 사는 캐나다는 동성결혼이 합법이다. 내가 사는 에드먼턴이라는 동네에서 세 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캘거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인구는 백 만쯤 되고 한인들도 만 명 이상 사는 동네인데 여기에 한인교회들이 열 개 정도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동성결혼법이 연방의회를 통과해 합법화될 당시 이 동네에서 제법 큰 한인교회의 목사와 일부 장로들이 분기탱천해 이 법의 의회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순리를 거스르는 죄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캐나다 한인사회에는 잠시 견초지성이라는 문법도 이상하고 유래도 불분명한 한자성어가 나돈 적이 있다고 한다. 아마 분기탱천한 한인 목사와 장로들이 동성결혼을 비난하며 교인들을 상대로 연설한 말들을 가리키는 단어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짐작에 견 자에 초 자 같기는 하지만 그 단어를 한자로 접한 적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