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두 개를 말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살인의 추억’ 과 ‘올드보이’를 꼽겠다. 홍상수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의 ‘수준 높은’ 작품(이를 테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같은)이 아니어서 실망했어도 할 수 없다. 영화는 수준이 아니라 기호에 따라 선호도가 결정되는 거니까.
아무튼 이 두 영화만큼 이야기의 완성도와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 작품은 내가 본 모든 영화를 다 통틀어도 그리 흔치가 않다. ‘살인의 추억’은 다른 건 제쳐두고 시골 형사 박두만 역에 더할 수 없이 어울렸던 송강호의 연기가 압권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박두만 형사’가 근무했던 경찰서는 경기도 화성경찰서였을 것이다. 1980 년대 라면 경찰공무원 중 우수인력은 거의 정보-대공부서에 집중 배치되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연쇄살인자(FBI Behavioural Science 의 Crime Classification Manual기준에 근거한)를 추적했던 사건 초기 전담형사는 당시 한신대생들의 정보를 수집하던 화성경찰서 정보과의 그 두 김 형사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주변부 인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자신을 예술가로 알고 있는 그 교활한 살인자를 못 잡은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그것도 반경 5 km 내외에서 열 차례나 발생한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수사의 시작이랄 수 있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었다. 박두만 형사는 줄곧 ‘누가 왜 죽였을까’ 하는 질문에만 매달렸다. 그런 잘못된 질문에만 매달리다 보니 나오는 답은 뻔한 곳에서만 맴돌았다. ‘동네 양아치들이 부녀자들을 강간하려다 여의치 않아 죽이게 됐다’는 상상의 한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이우진의 대사를 통해 ‘잘못된 질문’에 대한 환기가 등장한다. 상상 조차할 수 없었던 대 반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었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왜 가두었을까가 아니고, 왜 풀어주었을 까란 말이야. 잘못된 질문만 하니까 잘못된 대답만 나오고 있는 거잖아!”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시작해야 할 질문은 ‘왜 죽였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죽였으며, 범인이 무엇을 남기거나 가져갔느냐’다. 여기서 범인이 남기거나 가져간 것은 실수로 한 행위가 아니라 고의적인 작업 습관이고 ‘죽여가는 절차’는 범인이 사전에 분초 단위로 기획한 ‘작품의 형태’를 반영한다. 이들은 목표물(피해자)를 ‘수집’하는 순간부터 ‘작품을 완성하고’ 마무리를 한 뒤 ‘작업실’(살해현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정상혈압과 맥박을 유지한다.
범행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일반 살인자들과는 달리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놀라우리만치 정교하고 신속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무아지경’에 빠진다고 한다. 작업이 끝난 뒤에는 일정한 냉각기(cooling off)를 가지게 되는데 이때는 지난 작품활동에 대한 면밀한 재평가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변태적인 성욕이 범행을 추진하는 동기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했지만 연쇄살인자들의 심리란 그렇게 한가지로 단순하게 도식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새로운 질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쇄살인자들에 대한 프로파일링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것을 최초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막중과제가 띨띨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1980 년대 그 화성경찰서 형사들에게 떨어졌던 것이다. 이미 이때부터 살인자 검거란 일찌감치 물 건너간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상한 건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 1991 년 이후 ‘그가 작품활동’을 일체 중단했다는 것이다. 죽었거나 검거된 경우가 아니라면 연쇄살인자가 살인을 중단하는 건 헤로인 중독자가 스스로 주사를 맞지 않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어제 리빙룸 창 밖 잔디밭 위에 우뚝 서 있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을 바라보며 갑자기 영화 ‘살인의 추억’과 함께 그 때 그 살인자가 생각났다.
그는 지금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마지막 작품의 어떤 잘못된(?) 부분이 그의 다음 행동동기유발에 치명적인 차단작용을 일으켜 살인행각을 중단하게 된 것일까?
연쇄살인자들을 추적하기 위한 프로파일링 기법에서는 단연 FBI Behavioural Science (미국 연방수사국 행동과학과) 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예전에 읽었던 Mind Hunter 라는 책에도 일부 소개가 된 적이 있는데 FBI 의 매뉴얼은 연쇄살인자들은 그들 각자가 나타내는 작품성향의 차이를 막론하고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소개한다.
- The majority are single, white males. (대부분은 백인 남자 독신자다. 그러니까 한국인일 경우에도 남자 독신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They are often intelligent, with IQs in the "bright normal" range. (대부분 지적이고 지능지수는 평균이상이다)
- Despite their high IQs, they do poorly in school, have trouble holding down jobs, and often work menial jobs. (지능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성적은 형편없으며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한다. 지적인 능력에 맞지 않게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 They tend to come from unstable families. (안정되지 않은 가족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 As children, they are typically abandoned by their fathers and raised by domineering mothers. (아버지가 없이 간섭과 제재가 심한 괄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 Their families often have criminal, psychiatric and alcoholic histories. (가족 중에 범법기록이 있거나 정신병력 또는 알코올중독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 They often are mistrustful of their parents. (부모를 불신하는 경우가 많다)
- It is common to find that as children, they were abused—psychologically, physically and/or sexually—by a family member. (어렸을 때 가족(부모 포함)으로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하거나,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Many spend time in institutions as children and have records of early psychiatric problems. (많은 경우 어렸을 때 이미 정신적인 문제로 병원 등의 신세를 진 적이 있다)
- They have high rates of suicide attempts. (자살시도 비율이 높다)
- From an early age, many are intensely interested in voyeurism, fetishism, and sadomasochistic pornography.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의 침실을 엿본다거나 여동생이나 누나의 속옷을 훔친다거나 자신 또는 상대방의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성적 만족을 느낀다거나, 포르노에 탐닉했다)
- More than 60 percent wet their beds beyond the age of 12. (그들 중 60 % 이상이 열 두 살이 넘도록 침대에 오줌을 쌌다)
- Many are fascinated with fire starting. (불장난을 좋아한다)
- They are involved in sadistic activity or tormenting small creatures.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쥐덫에 잡힌 쥐를 서서히 죽이는 놀이를 한 경우가 많다)
주위에 이런 사람 있으면 조심하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편견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사람들 중 연쇄살인자의 길로 들어서는 비율은 높은 게 아니다. 다만 연쇄살인자들을 잡아놓고 연구를 하다 보니 이런 공통점이 발견되더란 이야기다.
다만 모처럼 이런 이야기 나온 김에 이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아직 한국에 그런 부모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부모가 누구냐 하면……
사랑의 매든 뭐든 아이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매를 드는 부모다.
예 8 번의 육체적 학대란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사랑의 매’라는 미명아래 회초리를 드는 행위도 여기에 포함된다. 어린 시절 이성적 논리가 아닌 폭력이 겁이나 자기 의지를 변경해야 하는 경험을 겪은 아이들은 무의식 중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과 함께 상대방의 의지를 변경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폭력이라는 의식을 각인한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술 먹고 들어와서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대는 것 과 근엄하고 절제된 표정으로 사랑의 회초리를 드는 행위를 어떻게 ‘폭력’이라는 말로 같이 취급할 수 있느냐고?
여기에 대한 답변은 ‘올드보이’의 이우진이 해 줄 것이다.
“모래알이나 바위덩어리나 물에 가라 앉기는 마찬가지죠”
아이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 없다면 스스로 교도소로 들어가라. 그게 차선이니까.
추신: 흐르는 음악은 어느 기장논객이 좋아하던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주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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