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그 전혀 다른 나라

뉴욕, 그 전혀 다른 나라(3)

sarnia 2005. 12. 6. 06:57

어퍼 베이라고 불리 우는 맨하튼 남쪽바다에서 보는 맨하튼 스카이라인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맨하튼 스카이라인의 제대로 모습을 보려면 부루클린 다리의 중간쯤까지 가든지 아니면 허드슨 강을 통과하는 크루즈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거대한 빌딩 숲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대개 부루클린 다리나 뉴저지 쪽에서 앵글을 잡은 것이다.

 

 

다시 맨하튼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 . 뉴욕의 늦가을 날씨 치고는 청명하고 따뜻했다. 플러싱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뉴욕에서 가장 한인타운이 있는 곳이었다. 가서 점심이나 먹고 요량으로 업타운행 지하철을 탔다. 타임스퀘어에서 다시 플러싱으로 가는 7호선으로 갈아탔다. 이스트 강을 건너 퀸스에 들어서자마자 7호선은 지하에서 나와 지상을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에 펼쳐지는 퀸스의 모습은 오래된 대도시답게 복잡하고 황량했다. 샌프란시스코 밴쿠버 같은 서부도시들이 풍기는 산뜻한 분위기는 찾아 수가 없었다. 차라리 7, 80년대 서울의 모습과 많이 닮은 같았다.

 

 

 

정오쯤 플러싱에 도착했다. 역을 나오자 뜻밖에도 거대한 중국인 거리가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플러싱이 있는 퀸스의 인구는 대략 250 정도. 중국, 인도, 필리핀 아시아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를 말해 주듯 중심지인 플러싱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아시아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만히 보니 이곳은 중국인 거리라기 보다는 마치 상하이 뭄바이 호치민 촐롱거리를 뒤섞어 놓은듯한 잡탕거리인 같았다.

 

인도식당 보였다. 직장동료 중에 인도 펀잡주의 수도 찬디가르 에서 회계사를 하던 친구가 있는데 언젠가 그에게서 얻어먹은 인도음식이 생각났다.로티 (힌디어로는 차파티라고 한다) 라는 만두피를 닮은 밀가루 위에 카레로 양념을 감자와 갖은 야채를 얹어 먹는 것인데 생각보다 맛이 훌륭했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식사대접은 일종의 화해 이었는데, 그것은 얼마 인도의 역사-정치 문제에 대한 대화 그와 언쟁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힌두교도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인도의 사회 경제적 지배구조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자화할랄 네루 조차도 그에게는 �었을 약간 진보적인 했던 브라만 출신 귀공자들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네루의 인디라 간디가 수상 재임 당시 시크교도들의 성지 골든탬플을 유린하고 교도들을 학살한 사건은 20년이 넘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 비극으로 그에게 남아 있는 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어쨌든 플러싱의 인도식당에서 로티 차로 식사를 마친 한인타운을 찾아 나섰다. 한인타운은 플러싱역 종점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80년대 초반의 서울 변두리의 동네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1990년대 이후 투자이민, 독립이민을 이른바 이민 신세대가 태반을 차지하는 서부 캐나다의 한인들과는 풍기는 이미지부터가 판이했다. 담배를 입에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거리를 걸어가는 남자들, 퉁명스러운 가게 아줌마, 무슨 유니 폼처럼 들고 다니는 버버리 핸드백. 한마디로 순진무구한 시골스러음이 곳곳에서 묻어 나오는 듯한 동네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유니온 가에 있는 한국식 중국식당에서 잊을 없는 맛의 자장면을 먹었다. 아무래도 로티 개로는 양이 차지 않은 같아 간단하게 요기를 양으로 근처 중국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단무지 양파를 먼저 가져다 놓고 1 분도 안돼 자장면이 날라져 왔다. 손님에게는 한국말로 자기들끼리는 중국말로 이야기를 하는 걸로 보아 한국에서 이민 화교인 같았다. 나는 아주 어렸을 즐겨 먹었던 종로경찰서 부근 중국집의 자장면 맛을 이직도 기억하고 있다. 안국동에 살면서 안동유치원 재동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꼬마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때는 내가 자장면을 아주 좋아했는지 거의 매주 토요일 오후 마다 집에서 시켜먹었다. 어린 입맛에 길들여진 자장면 맛은 후에도 명품 자장면 기준으로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는데, 40 가까이 지난 뉴욕의 귀퉁이에서 거의 똑같다고 있는 명품 자장면의 맛을 다시 보게 것이다. ( 내가 식당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오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플러싱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7호선을 타고 다시 맨하튼으로 들어갔다.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내려 업타운 지하철로 갈아탄 다시 86 번가에서 내려 센츠럴파크 쪽으로 걸어갔다. 거리는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행인들 아프리카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남쪽보다 높아진 같았다. 이마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닥터 마틴 루터 블리바드 이름 지어진 125 번가와 북쪽 구역은 거의 완전한 그들만의 구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문화를 경험하게 업타운 행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하는 필수 코스가 곳이 아니었다. 우선 월요일이라 개관하지는 않지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겉모습 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박물관은 건물 외장공사를 하느라고 거대한 거적떼기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북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 지역의 예술작품 3천여 만점을 소장하고 있는 장엄하리만치 규모가 어마 어마한 박물관은 대충 둘러 보는 데만 1 주일이 걸린다는 곳이다.

 

 

 

센트럴파크를 끼고 내려 오는 길은 다름아닌 5th Avenue였다. 오후 3 . 5th Avenue 넓은 대로가 모두 일방통행인데도 차량이 밀리고 있었다. 여기서 1 번부터 4 번까지 아무 버스나 타도 다운타운까지 내려갈 있었지만 이런 속도라면 유니온 스퀘어를 거쳐 그리니치 빌리지 까지 내려가는데 시간은 걸릴 같았다. 시간이 러시아워에 가까워질수록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교통체증은 심해질 것이었다. 맨하튼 지역은 어디를 가든 사람과 자동차가 들끓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시내를 관통하면서 거리 구경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번만은 지하철을 타지 않기로 했다.

 

14 번가 파크애비뉴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유니온 스퀘어에도 게이와 트랜스젠더들의 아성이라는 그리니치 빌리지 이스트 빌리지에도 넘치는 인파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간 불이어도 차들이 막혀 가지 않는다 싶으면 횡단보도는 즉시 보행자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거꾸로 차가 보행자들에게 양보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곳곳에 깔려있는 경찰들은 교통위반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했다. 가다 보니 어제 점심 무렵 처음 맨하튼에 도착했던 차이나타운이었다. 이미 주위가 어둑어둑해 지고 있었다. 이제 내일 새벽이면 뉴욕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같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공연시간은 오후 8시였다. 30 전쯤 브로드웨이에 있는 극장에 도착했다. 이미 로비에는 칵테일 잔을 들고 서성대는 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공연장 안으로 벌써 들어가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뉴요커들은 대부분 정장을 하고 있는 같았고 캐주얼 차림은 대개 관광객들일 것이다. 야구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같아 슬그머니 모자를 벗어 플라스틱 쇼핑백 속에 집어 넣었다.

 

좌석은 오케스트라 블록, 쉽게 말해 특등석이었다. 무대는 생각보다 작았다. 가스통 르루의 원작소설을 앤드류 로이드 웨어가 뮤지컬로 각색한 작품은 브로드웨이 에서만 17년째 롱런하고 있는 수작이다. 공연이 시작되자 마자 30만개의 유리구슬로 치장했다는 샹들리에가 관객들의 머리위로 날아 올랐다가 떨어진다. 놀랄 사이도 없이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화려한 볼거리들과 스토리에 빨려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뮤지컬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전에 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도 기왕 뉴욕에 왔으니 다는 마음으로 표를 샀고 극장에 들어와서도 지루해지면 어떤 폼을 하고 잠을 청할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나의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지루하기는커녕 중간 휴식을 포함해 2 시간 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특히 팬텀이 크리스틴을 배에 태워 죽음의 호수 편으로 사라질 환상적으로 변하는 무대장치와 조명 그리고 박자가 빠르면서도 장엄한 노래 ‘THE PHANTOM OF THE OPERA 팬텀이 혼자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THE MUSIC OF THE NIGHT 압권 중의 압권이었다. 공연이 막을 내리고 배우들이 잇달아 무대에 다시 차례로 등단하자 극장을 메운 관객들은 약속이나 일제히 일어나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가장 좋은 좌석을 40 퍼센트쯤 할인된 가격에 구입해 공연을 있었지만 100불을 주고 봤어도 후회는 했을 같았다.          

 

                

 

극장을 나오자 브로드웨이 거리는 예의 인파로 뒤덮여 있었다. 대체로 비슷한 시간에 주변 극장가에서의 공연들도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않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온 같았다. 그들과 섞여 걸어 가면서 뉴요커들은 빨리도 걷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문화는 아시아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중남미계든 아니면 중동계든 차이가 없는 같았다. 하긴 이런 도시에서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 따위를 논한다는 자체가 지극히 촌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뉴욕이었다. 진부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하고 요란하고 다양하고, 어떤 면에서는 개판 같은 도시를 내가 앞으로 자주 찾아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를 향해 8 번가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드먼턴. sarni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