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아프지 않는 체질인데 이 날 따라 몸살기가 좀 있었습니다.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태국에 갈 거라고 여기 저기 발표해 놓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나가 방콕 행 대한항공에 올랐습니다. 다행이 하늘로 날아 오르니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이걸 사진이라고 찍었는지…… 왕궁입니다.
수안나품 공항 입국수속은 간단했습니다. 입국 심사관은 이지적으로 생긴 20 대 후반 여자였습니다. 철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이 제법 날카로웠는데, 여권에 붙은 사진과 나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고는 여권을 스캔한 뒤 입국스탬프를 꽝하고 찍었습니다. 한마디 물어보는 법도 없었습니다.
추억의 내리닫이 창문 시내버스. 163 번 구파발가는 버스 아닌가요.
방콕은 이른 아침부터 습하고 더운 느낌입니다. 공기까지 매캐합니다. 호텔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베이지 바탕에 파란 줄과 빨간 줄이 각각 그려진 버스 두 대가 연달아 매연을 뿜으며 정류장에서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위 아래로 여닫는 구식 미쯔비시 버스였습니다. 어디서 이런 버스를 봤더라. 아마 1970 년 대 초에 굴러 다니던 서울 시내버스가 이렇게 생겼었을 겁니다.
이 보도블록 기억 나시나요?
그러고 보니 인도의 보도블록 또한 아주 낮 익은 것 입니다. 30cm X 30cm 정사각형 시멘트 보도블록. 이건 서울 1980 년대 모드죠. 그 시절 DDD 정권과 7 년 전쟁을 하면서 숫하게 깨뜨려 써먹었던 주 무기였는데 잊을 리가 있습니까. DDD, 참 오랜만에 쓰는 말입니다. 두환이, 대머리, 돌대가리의 이니셜이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는 그 당시 처음 등장한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최근 반정부시위 때문인지 왕궁의 경비는 삼엄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첫 관람객들이 왕궁 정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약 2 개 중대 규모의 경비병력이 단독군장 차림으로 일조점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간부로 보이는 중년의 제복이 앞에 서서 뭐라고 열라 구라를 풀고 있었는데 병사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처나 수방사 소속 부대인데 그 기강이 매우 자유스러운 당나라 군대입니다.
시골에서 방콕 왕궁구경을 온 초등학생들 같습니다.
더위에 쫓겨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대충 둘러보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읽은 ‘태국사원 감상요령’이 생각났습니다. ‘눈을 감으면 눈부시게 화려하던 영상은 사라지고 맑은 풍경소리가 은은히 들려올 것이라고’. 그 말을 믿고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풍경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무더위에 지쳐 마음이 콩밭(에어컨 나오는 쇼핑몰)에 가 있는데 풍경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습니다. 옆에 단청이 칠해진 건물이 보이자 그리로 서둘러 걸어 들어갔습니다. 힌두교 신화 라마야나가 태국인 나름의 상상력에 의해 각색되어 벽화로 그려진 화랑(라마끼엔)에서는 좀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라마끼엔에 심취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실내라 좀 시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궁이 있는 강북의 부촌 2 층 판자집
반대편 강남의 빈촌 단층 판자집
짜오프라야 강에서 르아두언(수상버스)를 타고 가면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고층 건물들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은 완전히 딴 세상입니다. 1960 년대 미아리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다 쓰러져 가는 수상가옥들이 강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목조 판자집들이 나무기둥 몇 개의 의지한 채 출렁이는 강물 위에 버티고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때가 덕지덕지 붙은 창문 밖으로는 누더기 같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인기척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 사는 집인 것 만은 분명했습니다.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조차 있을 것 같지 않은 저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 사는 아이들은 허구 헌날 저녁때만 되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요란 지랄을 떨며 코 앞을 왔다 갔다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디너크루즈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습니다.
차이나타운(위) 싸얌 패라곤과 월텍 사이의 번화가(아래)
수술 중 숨진 여아의 유해
씨리랏 병원의 법의학 박물관(forensic Medicine Museum)과 해부학 박물관(Anatomical Museum)은 우연히 자료에서 발견해 물어 물어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각종 사고 질병으로 숨진 사람들의 시체와 신체부위 등을 생생한 실물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곳 입니다. 오래된 목조건물이었는데 제가 갔을 땐 아무도 없어 저 혼자 둘러보았습니다. 비위가 약한 분은 삼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싸얌 패라곤 근처에 있는 사원에서 한 태국 아가씨가 무언가 기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늘에 앉아 모자로 부채질을 해 가며 밀크쉐이크를 마시다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아가씨는 뙤약볕이 내려 쬐는 대리석 위에 맨발로 서서 20 분 이상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이 아가씨 나름의 신앙(불심)이 아니었다면 5 분도 안 돼 열사병으로 졸도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만큼 뜨거운 한 낮이었습니다.
시내의 어느 아파트 단지
3 일간 묵었던 호텔 객실에서 바라 본 방콕의 변두리 모습. 새벽마다 닭우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습니다.
X X X X
언젠가 李 장로님께서 “발 마사지를 받을 땐 못생긴 여자를 골라야 화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방콕에서 발 마사지를 세 번을 받았고 스파 패키지도 받았는데 마사지사(therapist)를 제가 고를 수도 없었고, 용모와 마사지 실력이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손님이 마사지사를 고를 수 있는 업소를 찾아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묵은 호텔이 있는 라차다피섹이라는 거리에 이런 업소들이 엄청 널려 있었는데, 그 빌딩 크기가 특급호텔 규모였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fishbowl(어항)이라는 유리관 안에 예쁜 언니들과 그 언니들 뺨치게 더 예쁜 트랜스젠더 형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여성들을 위한 호스트 마사지 개념의 성매매업소도 있었습니다. 아하 李 장로님이 가 보았다는 그 발 마사지업소가 바로 여기 였군요~
수도사도 아니고 남 안보는데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상관할 일은 아닌데 딸키운 아빠가 공개적으로 나불거릴 말은 아니죠? 그리고 앞으로 얼굴들고 태국을 공식방문할 생각일랑 아예 말고요.
X X X X
방콕. 손님을 마음 편안하게 하고 다시 오고 싶어하게 하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내년 이맘때도 노점에서 파는 저 20 바트(60 센트) 짜리 팟타이를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 오선생 당선 일단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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