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싸르니아입니다.
을지로 4 가에 있는 프리미어 베스트웨스턴 호텔국도에서 14 박 했습니다. 보통 국도호텔이라고 부릅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을지로 4 가’와 ‘국도’라는 이름에서 문득 떠 오르는 게 있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옛날 국도극장 자리에 지은 호텔입니다. 마포에 있는 가든호텔과 같은 계열의 자매호텔로 거의 똑같은 객실디자인이지만 객실면적은 가든호텔보다 약간 더 넓습니다. 넓은 통창으로 종묘의 숲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묘와 북악산을 보려면 북향객실로 방을 잡아야 합니다. 저는 호텔을 예약할 때 북향객실을 선호합니다. 햇빛이나 햇볕의 방해를 받지 않는 북향객실이 뷰의 빛깔이 뛰어날 뿐 아니라 휠씬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남쪽이 훨씬 풍광이 좋다든가, 호텔에 투숙하는 동안 화초를 키울 일이 없다면 남향객실을 선택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호텔 이야기가 아니고, 이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의 할렘가 풍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슬럼이라고 하지 않고 할렘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를 미리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강북도심에는 개발되지 않는 지역이 있지만, 여기는 익선동 한옥마을처럼 보존할 가치가 있는 옛모습은 아닙니다. 10 여 년 전 태국 방콕 라차다피섹에 있는 호텔에서 내려다보였던 풍경과 유사한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서울 도심의 4 가 구역입니다. 라차다피섹에서는 새벽 세 시에 난데없이 꼬끼요~ 하고 닭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여기서는 닭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진만 놓고보면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왼쪽에 있는 주상복합건물군인 것 같습니다. 종묘 바로 앞에서부터 퇴계로까지 남북축선으로 이어져 있는 저 낡아빠진 주상복합건물군이 서울 도심을 동서로 차단하며 주변의 발전을 정체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주상복합건물군은 1970 년대에 지어진 것인데, 저 건물군을 설계한 건축가는 모르긴 몰라도 창의성과 상상력이 매우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70 년대에 1970년대식으로 주상복합단지를 지었으니 그 상가가 10 년도 못가서 슬럼화하고 주변의 변화마저 정체시킨듯이 보입니다.
저 주상복합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같은 시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경동교회(장충동)와 특화된 고문실을 포함한 치안본부 대공분실건물(남영동)을 함께 설계했습니다.
건축가는 건축만 잘 하면 되지 다른 가치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탈지성 프로페셔널리즘의 전형입니다.
우연히 이 호텔에서 저 광경을 바라보면서 넷플릭스 태국영화 헝거를 봤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폴 셰프도 비슷한 유형의 사람입니다. 고객이 사냥해 온 요리재료가 불법사냥물이든 뭐든 요리사는 요리만 잘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그럴듯한 자리합리화 이론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보호대상인 코뿔새의 생명이 닭이나 돼지의 생명보다 더 소중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이 한 가지 면에서는 헝거의 폴 셰프와 한국의 저 건축가가 유사해 보이는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다른 점을 폴 셰프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표현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놈들은 창의력과 상상력이 부족해”
저는 개인적으로 폴 셰프의 이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배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자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배웠느냐가 더 중요하겠지요.
어쨌든
적어도 폴 셰프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요리사로서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70 년대에 70 년대식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건물을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가의 그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그렇고,
지난 14 일을 보냈던 국도호텔은 올 가을에 다시 예약할 의향이 있을 정도로 괜찮은 호텔이었습니다. 조식은 평범한 편이었지만요. 특히 매일 신경써서 제 방을 청소해 주신 룸메이드여사님께는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