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섹소폰 연주를 해 주신 임일용 님께 땡큐,, (두 번 째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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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기는 해외동포를 독자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작성했으므로 국내거주자분들께는 관심도가 떨어질 수 있다.
정중한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광화문 풍경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개인실명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이 여행기의 확실한 정치적 중립을 위해,
이름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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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재미를 선사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뉴욕에 타임스퀘어가 있다면 서울에는 광화문광장이 있다. 광화문 광장에 갔으면 꼭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 한 군데를 소개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다. 전쟁기념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처럼 스케일은 크지 않지만 다채롭고 아기자기하다.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대한민국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올해로 66 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물들은 현대사와 관련된 것들 뿐이다. 빗살무늬토기 고려청자 난중일기 같은 것들은 없다. 그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이나 사진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따분하지 않고 재미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광화문광장 동편에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북쪽 건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대사관은 정동 본관이 아니라 세종로 별관을 말한다.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미국대사관 건물은 찾기 쉽다. 중무장한 경찰특공대 병력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고 정문에 폭탄트럭방어용 삼중철제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어 금방 눈에 띄기 때문이다. 내가 갔을 때는 고바우영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각각 소련군과 미국군 점령지역임을 알리는 표지판, 한반도 전역 북위 38 도선에 설치됐던 이 표지판에는 영어와 러시아어 중국어로만 표기되어 있을 뿐 한글은 없다.
뜬금없게도 이 박물관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USS Meredith Victory) 실물모형이 의외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설명은 간단했는데 그마저도 사실과 다르게 표기해 놓은 곳이 있었다.
우선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대해서는 약 3 년 전 싸르니아가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한심한 기록 오류들을 발견하고 나서 이 기념관 방문기를 두 번 쓰면서 두 번 째 포스팅에서 다루었던 내용이다. 당시 전쟁기념관에서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관한 기록을 본 건 아니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다소 길게 언급했었다.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장진호 전투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한 미국군 제 10 군단과 해병대 병력 중 마지막 잔류인원과 전쟁물자를 싣고 떠나려던 흥남항의 마지막 철수선이었다.
함선이 아닌 화물선이기 때문에 승선정원은 60 명에 불과했다. 이미 병력은 거의 철수시켰기 때문에 이 배에는 잔여무기 일부와 철수작전 지휘인원 43 명 만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 때, 이 배의 선장 Captain Leonard LaRue 의 눈에 부두에 몰려와 있는 피난민들과 새파랗게 겁에 질린 채 오돌오돌 떨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들어왔다. 피난민들이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위험한 전선에서 멀어지기 위해, 말 그대로 '피난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고, 반대로 이승만 정권이 지긋지긋해서 피난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 마지막 배의 선장이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배에 실려있던 모든 무기와 적재화물을 바다에 투하하고 대신 피난민들을 태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배에서는 선장이 왕이다. 선장의 결단에 미국군 제 10 군단장 육군 중장 아먼드(Edward M. Almond) 도 아뭇소리 안 하고 선장의 명령에 따랐다.
1950 년 크리스마스 이브, 혹독하게 추웠던 고요한 밤, 군인과 민간인 등 무려 1 만 4 천 여 명이 승선한 매러디스 빅토리 (SS Meredith Victory)호가 무적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빠져나갔다. 승선난민 중에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홀로 승선했다'는 금순이 오빠도 있었을 것이다. 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오늘 현재 세계 항해사상 가장 많은 수의 난민을 태운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경상남도 장승포까지 가는 30 여 시간에 달하는 험하고도 머나 먼 항로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고생길이었다. 추위와 멀미, 굶주림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이 배가 항해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탄생하는 기적도 일어났다.
나는 그 때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역사소양을 제대로 갖춘 작가와 감독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다섯 명의 아이들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머리가 나쁜 삼류작가가 만들면 another 반북반공 영화가 탄생할테지만, 사실과 맥락을 역사의 심연 안에서 해석해 낼 줄 아는 gnostic artist 가 영화를 제작한다면 분단과 전쟁의 고뇌를 녹여내는 좋은 작품이 만들어 질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영화제목은 <1950 년 12 월 25 일 생> 으로 하면 무난할 것 같다.
참, 이 박물관에서 이 철수선 스토리에 대해 잘못 기록해 놓은 부분은 다름이 아니다.
이 인도적인 결단을 한 인물이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등 숱한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비난을 받고 있는 에드워드 아먼드 제 10 군단장이라고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결단을 한 인물은 아먼드 중장이 아니라 이 화물선의 선장인 Leonard laRue 였다. 아먼드 중장은 그 날이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라 감정이 나이브해져서 그랬는지 선장의 결단에 마지못해 동의했을 뿐이다.
이 박물관에는 교사들이 자기 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이런 저런 설명도 해 주던데,, 도대체 어떤 사악한 인간들이 이런 디테일을 슬쩍 바꿔치기해서 기록을 지능적으로 왜곡해 놓았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그냥 사실대로 기록해 놓았으면 좋겠다.
박물관에서는 제발 사실 그대로만 기록해 !!!
흥남철수작전을 배경으로 박시춘이
만든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작곡가 박시춘에 대해서는 '대중가요 3 천 여 곡을 만들어 어려운 시절 민중의 고달픈 삶을 위로한 예술가라는 평가와 함께, 조선 젊은이들을 죽음의 대동아전쟁으로 내 몬 전쟁범죄 부역자라는 상반된 시각이 함께 존재한다. 싸르니아는 2009 년 가을, 경남 밀양 영남루 근처에 있는 그의 생가에 찾아간 적이 있다. ...... 그 이야기하니까 그 날, 영남루 누각 아래 사당에서 만났던 아랑 낭자의 귀신이 또 생각나는군 -_-
시-발 (씨-발이 아니고)택시 라고 불린 지프가 대한민국에서 만든 최초의 차라고 한다. 나도 몰랐는데 얼마 전 오원철
씨 (아버지 박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 제 2 수석비서관을 오래 한 사람)
가 90 노구를 이끌고 나와 한경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증언하는 걸 들었다. 당시 그는 이 차를 만드는 공장의 공장장이었는데 자동차를 만들 철강이 없어 돼지껍데기 구워먹을 때 쓰는 배럴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도라무깡)을 잘라 만들었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 말이 하도 오락가락 횡설수설해서 어디까지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리 씨 인 걸 보니 모두 조선로동당 후보들이군,, 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대한민국 보수정당이었던 자유당 후보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겪은 패밀리를 꼽으라면 단연 ‘리기붕’ 일가일 것이다. ‘리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는 친아들인 리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당했다. 리강석 역시 부모와 동생을 죽인 뒤 스스로 자살했다. 그래서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들 일가족이 집단 자살했다고 이야기한다. 4.19 직후의 일이었다. 리강석의 생부와 생모는 리기붕-박마리아 부부지만, 법적 부모는 리승만-리, 프란체스카 부부다. 리강석이 리승만 에게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이다.
싸르니아는 대한민국이 빈곤과 기아의 수렁에서 벗어나는데 최초의 결정적 공로를 세운 분들로 이 분들을 꼽는데 은쾌히 동의한다. ‘일베’ 나 일베 비슷한 분들도 물론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니까 일베 여러분들도 독일 병원생활 수기를 쓴 파독 간호사 황보수자님의 뜻을 받들어 한국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착한 소년 소녀들이 되길 바란다.
꿈을 꿨어요 포니 포니 갖고 싶어요 포니 포니
아름다운 포니 포니 나의 사랑 포니 포니
현대 포-니 포니
1976 년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광고노래를 기억하시는가?
당시 대통령은 노래 작곡도 했다.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여 국민들에게 부르라고 권했었다.
근데 국민들이 새마을 노래는 안 부르고 대중가요만 부르니까 화가나서 그랬는지 대중가요 태반을 방송금지 해 버렸다.
대중가요 태반이 사라지자 국민들이 대신 부른 애창곡은 다름아닌 CM Song,, 포니 노래도 그 중 하나다.
저 포니 노래와 쌍벽을 이루던 1976 년 최고의 광고노래는 바로,,
‘열 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 둘이서 만나요 부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
흰구름 떠다가 지붕만들고 ~ XX크래카~
무지개 떠다가 대문만들고 ~ XX 크래카~
어때요 우리집 멋있잖아요,, XX크래카~
싸르니아가 중학교 1 학년 때 본 영자의 전성시대.
송재호는 청년 얼굴이었는데 최불암은 저 때도 지금과 비슷한 아저씨 모습이었다.
주인공 염복순은 얼굴이 기억 안난다.
1948 년 부터 1987 년 까지 39 년 동안 공화국이 다섯 번 바뀌었다. 헌법이 다섯 번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우연인지, 대통령도 다섯 번 바뀌었다. 그 중 세 명은 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자의반 타의반 또는 타의에 의해 쫓겨났고 한 명은 피살당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임기를 채우고 제 발로 걸어나가기는 했는데, 그 후 템플스테이와 빵깐스테이를 번갈아 해가며 몹시 주접스런 삶을 살아야 했다.
1987 년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7 년 동안에는 헌법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제 6 공화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 6 공화국을 노태우 집권 시기 (1988. 2 ~ 1993. 2) 라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제 6 공화국이다. 이 기간 동안에 재임한 대통령들은 적어도 임기를 못채우고 쫓겨나거나 피살당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