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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남코리아 편을 절대 들어주지 않는 쟁점이 있다. NLL 문제가 그것이다.
NLL (Northern Limit Line-서해북방한계선)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은 안 계실 것이므로 개념설명은 생략하겠다.
NLL 을 휴전선과 같은 의미의 군사분계선으로 규정지으려는 남코리아 보수진영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될 때마다 미국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NLL 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NLL 이 영토선이 아닌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군사분계선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남코리아 고위관리 중 서해북방한계선에 대해 가장 무식하고도 용감한 발언을 한 사람은 국방장관 김관진 씨다. 그는 최근 NLL을 영토선이라고 선언했다.
겉으로 보기에 북코리아 들으라고 한 선언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을 향해서 한 발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르니아는 그의 발언이 ‘무식한 발언’임과 동시에 ‘용감한 발언’이라는 평가를 함께 해 주는 거다.
미국은 왜 NLL 에 대한 남코리아 보수진영의 고집을 한사코 꺾으려고 하는 것일까?
심지어 미국이 평상시에는 서해 5 도가 남코리아의 영토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지만, NLL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될 때는 이 다섯 개의 섬이 유엔사의 군사적 점령지구라는 점을 일부러 강조해 김빼기 작전에 나선다. 왜 그러는 걸까?
NLL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정전협정 이야기를 먼저 해 보자.
우리가 가끔 잊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우리는 지금 1953 년 7 월 27 일 체결된 정전협정체제 연장선상에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정전협정은 유엔사를 일방으로 하고 북코리아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와 중국의 인민지원군 사령부를 다른 일방으로 하는 군사기구들간에 맺어진 상호조약이다. 그 기술적 주체는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 전쟁을 수행한 군사기구들이다.
남코리아는 정전협정상의 기술적 주체 명단에서조차 배제되어 있다. 1950 년 여름, 전쟁발발 보름만에 군작전통제권을 송두리째 미국에게 넘기는 바람에 협정 주체로서의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해 진행되고 종결됐다.
첫째, 정부대표에 의한 종전(평화)협정이 아닌 군지휘관들에 의한 휴전협정이 되어야 한다.
둘째, 영토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협상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미국에 의해 관철됐다. 영토문제를 협상대상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협정주체를 정부가 아닌 군사기구로 정한 것이다. 미국은 왜 한사코 영토문제를 협상대상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영토문제가 협상대상이 되면 그 협상주체가 남코리아 정부와 북코리아 정부가 될 수 밖에 없고, 국가간에 타결된 영토주권에 대해서는 미국이 향후 개입하거나 간섭할 국제법상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코리아의 평화협정체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평화협정은 군사기구간 협정이 아니라 국가간 협정이 되는 것이고, 부수적으로 양 코리아 정부간의 영토선 재확립 절차를 수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군사분계선이 통일 때까지 ‘주권국가간의 잠정적 영토선’으로 재개념화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되면 미국이 코리아반도에서 제멋대로 군림할 수 있는 합법적 조건이 사라지게 된다. 미국이 남코리아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근원적 파워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전협정체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서해 5 도 인근 서해 바다에 대해서도 미국은 이 정전협정에 근거한 일관된 입장을 견지할 수 밖에 없다. 즉 영해 (territorial waters)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NLL 은 협상없이 일방적으로 국제수역을 분리한 것이기 때문에 국제법은 물론이고 미국의 해양법에도 위배된다는 것이 미국의 일관된 논리다. 1975 년 2 월 28 일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이같은 입장을 밝힌 이래 지금까지 다른 소리를 한 적이 없다.
다른 소리를 하기는 커녕 2010 년 11 월 연평도 포격전 이후 남코리아에서 NLL 사수와 서해 해상주권 주장이 강하게 등장했을 때 미국 정부는 1975 년 발표된 서해 문제와 관련된 국무부 문건들을 언론에 새삼 공개하며 남코리아 보수진영과 이명박 정부를 고강도로 압박했다.
심지어 미국은 남코리아 보수진영이 주장하는 논리, 즉 “NLL 이 1953 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에 의해 설정된 이래 적어도 1973 년 10 월까지 북한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으므로 응고의 원칙에 따라 군사분계선으로 간주할 수 있다” 는 주장에도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유엔사는 ‘NLL 이 1953 년 8 월 30 일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에 의해 그어졌다는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고백했다. 이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문건이 지난 10 월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 비밀문서The West Coast Korean Islands 다.
이 문서 작성자는 “1950 년대에 NLL 이 설정되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는데도 남측 정부가 1953 년 이후 북한 (북코리아)가 상당기간 동안 NLL 을 존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 비판했다. 이 문건은 1973 년 10 월, 북코리아가 NLL 에 이의를 제기한 직후인 1974 년 1 월 작성됐다.
NLL 이 영토선이나 군사분계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남코리아 내부에서나 통하는 소리이지 남코리아 바깥에서는 씨도 안 먹히는 소리다.
남코리아 보수진영이 그나마 NLL 이 영토선이나 군사분계선은 아니되, 사실상의 해상불가침경계선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기는 있다. 1992 년 9 월 교환된 남북기본합의서다.
남북기본합의서 제 2 장11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 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서해북방한계선, 즉 NLL 을 염두에 두고 작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전제조건을 함축한 또 다른 조약문구가 따라붙어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바로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해 나가되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하기 로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앞으로 계속 협의해 나가야 할 해상불가침 경계선’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NLL 이다. 남북간 해상 경계선이 그어질 수 있는 바다는 동해와 서해 뿐인데 동해에는 이미 육상 군사분계선 동쪽 꼭지점으로부터 같은 위도상에 이어지는 해상경계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가침 경계선’ 논란이 필요하지 않다.
이에 반해 NLL 은 이 합의서에서 표현한 것 처럼 ‘앞으로 계속 협의해 나가야 할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 까지’ 라고 표현을 한 것은 합리적인 해상 경계선이 아직 확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쌍방 모두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남북기본합의서가 동구권과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북코리아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정치정세 속에서 보수정권인 노태우 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문서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는 NLL 재협상 가능성을 융통성 있게 열어 놓았다. 따라서 이제와서 남북기본합의서 제 2 장 11 조에 근거해 NLL 이 재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는 남코리아 보수진영의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 억지라는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남북기본합의서는 노태우 정부 당시의 남북고위급회담 체제의 산물인데, 남북고위급회담 체제란 그로부터 2 년 후 터진 제 1 차 북핵위기로 인해 무산된 체제이므로 그 산물인 남북기본합의서역시 이미 사문화된 문서나 다름없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남북기본합의서라는 것도 사문화가 됐든 아니든 부속합의서에서 시사하고 있는 NLL 에 대한 재협상 정신을 볼 때, NLL이 영토선 또는 군사분계선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유리할 게 없는 문서라는 것을 아울러 밝힐 수 있겠다.
어쨌든 노태우 정부 시절 교환된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에 따라 서해바다를 둘러싼 대립을 획기적으로 완화시킨 남북간 합의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10 . 4 선언만 떠 올리기 쉬운데 그 전에 이미 수 차례의 남북장성급군사회담을 통해 서해바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필연적 우발적 충돌을 회피할 수 있는 합의서가 채택됐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서해교전에서 얻은 값비싼 교훈 끝에 만들어 진 피눈믈의 산물이었다.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걷어차 버린 건 이명박 정권이었다. 결국 2010 년 11 월 23 일, 정전협정 이후 최초의 국지전이 연평도에서 발발했다. 18 년 공든탑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서해바다는 다시 증오와 긴장이 흐르는 저주의 바다로 변해버린 것이다.
대북문제에 관해 기본적으로 비슷한 시각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 정부와 남코리아 보수진영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국 정부는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역사적 팩트와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고 남코리아 보수진영은 ‘어거지와 비분강개’ 이외에는 자기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빅근혜 신임 대통령 당선인의 NLL 해법은 무엇일까?
서해바다를 평화수역으로 재건하느냐 아니면 전쟁의 먹구름이 감도는 아시아의 화약고로 전락시키느냐는 이제부터 그의 손과 머리에 달려 있다.
건투를 빈다.
2013 1.1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