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이 음악은 이 포스팅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보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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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제가 다른 제목으로 <에큐메니안>에 기고했던 글 입니다.
프놈바켕의 일몰을 촬영하기 위해 언덕 위에 모인 여행자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악을 이룬다”
캄보디아의 비극을 두고하는 말이다. 비극으로 가는 협력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증오였다. 증오를 불러일으킨 원초적 감정은 분노였을 것이다.
분노 중에서도 통제가 안되는 분노 (fury)가 집단화 됐을 때 언제나 대규모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울려퍼지곤 했다.
캄보디아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네 번의 key dates 부터 기억해야 한다.
1969 년 3 월 18 일,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전 작전구역을 캄보디아와 일부 라오스 영토로 확대하고 폭격에 관한 비밀작전계획 Operation Menu 를 수립했다.
1970 년 3 월 18일, 백악관과 CIA의 마스터플랜에 따라 론 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 괴뢰정부을 수립했다.
1975 년 4 월 17 일, 론 놀 괴뢰정부를 전복하고 크메르루주군이 프놈펜에 진주했다.
1979 년 1 월 7 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 (캄푸치아 구국연합전선)이 프놈펜을 점령했다.
우선 이 네 번의 key dates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미국이 베트남전의 작전구역을 캄보디아로 확대한 1969 년 3 월부터 1979 년 1 월 크메르루주가 물러나기까지 약 10 년 동안 집계가 불가능한 숫자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했다. 사망자수를 집계한 통계주체에 따라 다르지만, 이 기간 동안 대체로 70 만 명에서 최고 200 만 명 가량이 자연사 이외의 원인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군 폭격으로 숨진 사람이 수 십 만 명, 물자부족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역시 수 십 만 명이 사망했다. 혹서기인 1975 년 4 월 프놈펜 소개과정에서 더위 등으로 사망한 사람도 적지 않다. 캄푸치아 민주공화국이 정권을 장악했던 1975 년 4 월 17 일부터 1979 년 1 월 7 일 사이에 최소한 십 만 명 이상이 각급단위의 정부조직에 의해 처형됐다.
도대체 캄보디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75 년 4 월 17 일, 크메르루주 유격부대가 수도 프놈펜 시내로 진주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유학생 출신 리더들이 지휘하는 당시의 혁명군 모습을 살펴보면 매우 특이한 점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붉은 색 체크무늬 마후라를 두른 선봉부대 구성원 대부분이 청소년들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아이들의 눈에서 섬뜩한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해 같은 달 30 일 사이공 시내로 진주하던 NLF와 인민해방군 연합군 병사들의 질서있고 여유있는 모습하고는 사뭇 달랐다. 당시 현장에서 크메르루주의 시내진주 광경을 취재했던 프리랜서 종군기자 나오키 마부치는 '4 월 17 일 오전 선봉부대가 프놈펜 시내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시민들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그 날의 취재일기를 기록했지만, 적어도 유격부대에 소속된 어린 병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어린 병사들은 다름아닌 전쟁고아들이었다.
그들은 왜 전쟁고아가 되어야만 했을까?
아울러 왜 그들은 수도 프놈펜에 들어오면서 원한에 사무친 표정을 감추지 못했을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론 놀 정권을 세운데는 가증스런 이유가 있었다.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는 호치민 루트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 대한 무차별 융단폭격이 필요했는데, 이 작전에 동의하고 협력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친미정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론 놀은 집권하자마자 미국에게 자국 영토를 마음대로 유린하고 자국민들을 마음대로 폭격 학살해도 좋다는 어처구니없는 ‘면허증’을 발부해 주었다.
외국군대가 자국민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을 묵인하고 협력한 론 놀은 도대체 어떤 작자였는가?
론 놀은 1913 년 생으로 살아있다면 올해 100 세다. 그는 프놈펜이 크메르루주의 수중에 떨어지기 16 일 전인 1975 년 4 월 1 일, 대통령궁을 탈출해 미국으로 도망간 후 캘리포니아 오륀지 카운티 인근의 부촌 Fullerton 에서 안락하게 여생을 즐기다가 1985 년 죽었다.
론 놀은 1937 년 부터 당시 캄보디아를 식민통치하고 있던 프랑스 식민통치기구에 취직해서 친프랑스 관료로 충성을 다하다가 magistrate (주 판무관)로 승진하여 프랑스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캄보디아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1946 년에는 Kriate 주의 주지사가 된 뒤, 1953 년 프랑스 식민통치가 종식되자마자 재빠르게 우익 왕당파로 변신하여 시아누크 아래에서 국방장관과 수상을 역임했다.
론 놀에게 좌익 경력이 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변절의 폭이 얼토당토않게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닉슨 행정부는 의회의 승인까지 받아 캄보디아의 영토 약 40 퍼센트에 달하는 지역을 작전지역으로 선포하고 극비리에 예고없는 폭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군 공군기지 (3rd Air Division) 에서 출격한 B-52 폭격기들이 55 개월동안 무려 60 만 톤에 달하는 포탄을 퍼부었다. 포탄을 투하하는 탄착지대가 민간인 거주지인가 여부는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 지역이 COSVN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사령부)의 이동경로일 가능성이 있는가가 공격여부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사실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공중폭격은 시아누크가 미국이 배후조종한 쿠테타로 축출되기 딱 1 년 전인 1969 년 3 월부터 시작됐는데, 폭격사실을 시아누크 정부에 일체 알리지 않았다. 공습경보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처음에 미국은 베트남 접경 캄보디아 영토 안 쪽 50 km 까지를 공격대상으로 삼아 폭격을 가했지만, 론 놀 집권 후 부터는 그 경계선이 훨씬 안쪽으로 넓어졌고, 폭격횟수나 투하하는 포탄의 종류와 양도 훨씬 다양해지고 많아졌다. 광범위한 지역에 대인지뢰가 무더기로 살포됐다. 수 십 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민간인들이 영문도 모른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맞아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형제가 포탄파편과 폭발폭풍에 의해, 그리고 느닷없이 아무데서나 터지는 대인지뢰에 의해 온 몸이 갈갈이 찢겨진 채 죽어가는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극도의 슬픔과 공포에 휩싸인 채 거의 혼절상태에서 굶어죽기 직전 유격대에 의해 구조됐다. 아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은 그 길로 유격대를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자연히 크메르루주의 어린 병사가 됐다.
크메르루주는 이 아이들에게 반미-반론 놀 사상을 교육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이미 사상이나 이론 이전에 눈 앞에서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꼴을 목격한 살아있는 ‘원혼들’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전쟁고아들이 크메르루주의 유격부대를 채워갔다. 부르주와 츨신 지식인들이 대부분인 크메르루주의 리더들이 오히려 이 아이들에게 사상적 개조를 당해야 할 판이었다. 눈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버려진 전쟁고아들이 채워가는 크메르루주 유격대는 이미 혁명군이 아니라 증오심에 불타는 '어린 원혼들의 집단'으로 그 분위기와 성격이 변해갔다. 피비린내나는 복수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린병사들에게 론 놀 정권이란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수도 프놈펜은 매국노들의 소굴이었으며, 미국과 론 놀 정권에 협조한 관료와 지식인들은 모조리 복수의 대상이었다.
크메르루주의 지도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도올 김용옥 선생은 2005 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앙코르와트-월남가다’ 상권에서 폴 포트의 사상을 노자에게 영향을 받은 ‘반문명론적 자연주의’로 설명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자 금욕주의자인 그가 ‘순결한 인간사회의 실현’을 지도적으로 실천하려다 좌절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문제의 전부일까?
사실 폴 포트의 반문명론적 자연주의는 크메르루주 최고 이론가 키우 삼판의 논문 에서도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크메르루주 리더들의 비젼이 무엇이었든 그것이 집권 이후의 대규모 처형사태를 제대로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아직까지 킬링필드같은 엉터리 미국영화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캄푸치아 민주공화국 집권 시기에 적어도 십 만 명 이상이 정치적으로 희생된 건 사실인 듯하다.
문제는 사상의 비현실성이나 교조주의가 아니라 크메르루주 지도부의 놀랄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좌편향 기회주의가 아니었을까?
폴 포트와 키우 삼판을 비롯한 지도부 대부분은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었다. 20 세기의 사회주의 사상 중 마오이즘의 실천론의 영향을 받은 그룹들은 자유주의와 부르주와 출신성분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배격과 차별의식이 존재했다. 실천론이란 중국혁명사의 역사적 경험들을 이론적 틀에 생산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제작된 철학이었지만, 이론가들이 실천론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인식심화의 토대로서의 존재와 실천의 범위'를 계급적 출신성분에까지 확대하기도 했다.
혁명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리더들은 거의 예외없이 브르주와 츨신 지식인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의식속에는 이른바 기본계급 (노동자 농민) 출신에 대한 숭배의식이 기형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이들이 자신의 부유한 출신성분에 대해 가졌던 열등감과 지나친 자아비판의식은 좋은 면 보다는 나쁜 면으로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의견이 브르주와적 자유주의와 반혁명적 감상주의로 곡해되고 비판받을까봐 겁부터 집어먹기 일쑤였다. 캄보디아처럼 미국과 친미매국정권이 저질러 놓은 죄악이 엄청난 나라일수록 부르주와 출신이 지배하는 혁명지도부는 그 정도가 심한 좌편향기회주의로 기울어지기 십상이었다.
한마디로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스스로의 기회주의 때문에 ‘민중의 분노’를 지도적으로 통제하기 보다는 그 ‘분노’에 야합하고, 나아가 그 분노를 조직하는 쪽을 선택했다. 최상층부에 있는 리더들이 ‘혁명원칙준수’을 빙자해 함부로 내뱉은 과격한 발언들은 어떠한 여과과정이나 재수렴 과정없이 하부단위에서 그대로 정책으로 실천됐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용서없는 복수였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무자비하게 살상됐다.
크메르루주의 비극은 ‘반문명론적 자연주의’로 집약되는 그들의 사상 자체가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리더들이 국가통제임무를 방기한 채, 스스로의 보신주의에 빠져 불합리한 대중정서에 야합하면서 과격하고도 교조주의적인 원칙론만 늘어놓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 날 점심 무렵 쓰리 쓰랑에서 산책하다가 마사코가 갑자기 Bantreay Srei 에 가지고 제안했다.
싸르니아의 당초 여행계획에는 Bantreay Srei 가 들어있지 않았다. 길동무 마사코가 Bantreay Srei에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냥 그 곳에 가게 된 것이다.
작년에 안동에 갔을 때도 안동역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타이완 배낭여행자 때문에 병산서원에 가는 대신 도산서원에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내에서 약 25 km 떨어진 이 사원 부근은 1990 년대 중반까지 정부군과 크메르루주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뜷린듯 쏟아지는 폭우때문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그 날 오후,
잠시 정차해 있는 툭툭 카나피 안으로 들이닥치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옆에 앉아있는 마사코에게 불쑥 이런 질문을 해봤다.
“혹시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정글 어디에 숨어있는 크메르루주 병사가 있는 게 아닐까?”
아름다운 Bantreay Srei 사원.
도착했을 때 사원은 텅 비어 있었다.
그 폭우를 뜷고 여기까지 온 팀이 우리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낙관 아래 벽에 여신상 Devata 가 보인다.
앙드레 말로가 프랑스로 밀반출하려다 도둑놈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 여신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