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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홈피 회원 여러분께

sarnia 2012. 2. 13. 16:17

우선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홈피 회원 여러분께 큰 절 부터 올립니다.

 

세어보니 제가 지난 5 9 개월 동안 이 게시판에만 290 편의 글을 올렸던데, 토론방을 포함하면 약 400 편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이네요.  

 

책 이야기 나왔으니 책부터 몇 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한 시간 독서하고 세 시간 사색하는 생활을 반복하다보면 누구나 위대한 철학자나 사상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장 게시판의 평신도들 모두 '위대한 사상가'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시기를 바란답니다 ^^  

 

마커스 보그 (Marcus J. Borg) 검색하다가 우연히 어떤 연구소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좋은 책들을 몇 개 발견했습니다. 참고로 기독교를 연구하면서 겸사겸사 책도 출판하는 것 같은 그 단체는 제가 전혀 모르는 곳 입니다. 광고 아니니까 쓸데없는 오해 마시구요.

 

마커스 보그가 고백한 신앙의 변화를 주제삼아 제 이야기로 구라를 풀어볼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근데, 마커스 보그가 누구냐고요?

미국의 성서학자 입니다. 평신도님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신학하는 동네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 입니다. 오레곤 주립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다가 65 세 때인 2007 년 은퇴했습니다.

 

이 분의 저서 The God We Never Knew 는 상당히 흥미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철저한 근본주의 기독교 신관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이, 심지어 '성서무오'까지는 아니더라도 부활이나 기적 이야기같은 것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자신이 어떻게 나중에 성숙한 기독교인으로 변화했는가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지요.

 

이 분의 책을 읽다보면 역시 '믿음이 흔들흔들 하다가 일단 와르르 무너지는 것' 이야말로 애벌레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변화에 필적할만큼 놀랍고도 고마운 경험이구나하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경험이란 다 비슷한 것 같아 친근감도 들고요. 영어로 transformation 이라고 하는데 한국어로는 적당한 한 단어 표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두 단어를 사용해 본질적 변화라고 해야 하나요?  

 

근데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그 책이 아니고요. 다른 책 입니다.  

 

이 분이 사도바울에 관해 참 흥미있는 책을 하나 썼군요. '첫 번째 바울' 이라는 책인데요. 원제는 'The First Paul' 입니다.  

 

제가 바울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직접 담당한 수사관 이어서 그런지 바로 눈에 띄었습니다.

 

마커스 보그 혼자 쓴 게 아니고 존 도미니크 그로산 이라는 분과 같이 썼습니다. 크로산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서 카톨릭 교회 소속의 성서학자 (신약) 입니다.

 

 

 

 

 

왜 제목이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지만,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은 삼가하겠습니다.

 

제가 읽은 적이 없지만 재미있고 유익할 것 거 같아서 소개하는 겁니다. 먼저 읽어보시고 독후감을 제게 전해 주세요^^

신약 성서에 세 사람의 각각 다른 바울이 있다는 소개문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즉 혁명가 바울과 보수주의자 바울, 수구반동 바울이 모두 등장한다는 거지요.

이 세계적인 신약학의 대가들은 제도화된 로마 교회가 나중에 바울의 편지들을 어떻게 첨삭하고 창작했는지를 철저한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고 하니까 기대를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참 이 사이트에 보니까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라는 책도 보이는데요.

이 책은 신간은 아니고 원서가 출간된 지는 5 년, 한국어로 번역된지는 3 년 쯤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이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 ‘Jesus for the Non Religious’ 의 번역본 이라는 걸 몰랐다가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제목이 원서제목과는 너무 판이해 서로 연결을 못 시켰던 거지요. 저자와 목차를 보고서야 같은 책인 걸 알았습니다. ㅎㅎ

 

 

저는 2007 년 출간한 이 책이 2 년 만 먼저 나왔더라도 리차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 (God Delusion) 같은 책을 좀 더 신중한 내용으로 구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도킨스가 만일 기독교의 놀라운 진화를 간파하고 있다면 약간 부끄러워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무신론은 결코 몰락한 유신론의 대안이 될 수 없지요. 유신론의 몰락으로 텅 비어버린 교회는 반드시 다시 채워질 것 입니다. 다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사람들로 말이지요.

위의 책 맨 위에 붙은 '인간의 가슴에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라는 문구가 참 인상적입니다. 좀 직설적이라 세련된 맛은 없지만 말이죠.

책 표지에 있는 저 그림 좀 보세요.

십자가에 달린 것도 서러운데, 십자가에 달린 채로 철조망 우리에 갇혀 있는 예수 선생의 모습.. 너무 슬프죠?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우리 평신도들도 잘 아는 철학자 중에 폴 틸리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뛰어난 사상가의 창조적인 이야기는 기독교를 크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변화시키고 있는 선두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셈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른 차원으로 이해할 때, 즉 어떤 존재 (a being) 라기 보다는 존재의 근거 (the ground of being) 로 이해할 때 신학적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신을 인격체처럼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설정하게 되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되는데, 거기다가 무소불위니 전지전능이니 하는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개념을 억지로 가져다 붙이니까 뒤죽박죽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되는 바람에 결국 사람들이 짜증나서 몽땅 교회를 떠난 게 아닐까, 이런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가슴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예배당에 앉아 있을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 이지요.     

sarnia 님의 경우...... 분석을 통한 예측은 맞은 적이 별로 없었지만, 직관을 통한 추측은 거의 100 % 적중했으니까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들은 학자들의 연구실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연구사이트 같은 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을 하지만 철저하게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냥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철저하게'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1947 년 부터 1956 년까지 쿰란 동굴 11 개소에서 무려 972 편에 이르는 히브리 경전 원본 사해문서 (The Dead Sea Scroll)가 발견되었을 때,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보수교회의 압력을 받은 보수 학자들 몇 명이 움켜쥐고 똥을 주무르고 있다가 학계와 언론의 거센 항의를 받고 나서야 뒤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교계 전체가 문서조작 사기꾼으로 몰릴뻔 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도 철저하게 잘못된 '쉬쉬 발상'에서 비롯된 것 입니다.

당시 보수 교회가 사해문서를 결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이유는 딴 게 아니라,  예수 선생 신화와 아주 유사한 메시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세네파의 메시아 이야기가 그 문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세네파의 메시아가 예수 선생보다 무려 150 년이나 형님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 이지요.     

진실은 막을 수도 없거니와 막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교훈아닐까요? 싯타르타 선생이 예수 선생의 형님이라고 해서 예수 선생 보고 짝퉁이라거나 표절했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참나를 깨닫고 성불한 성인들의 공통된 이야기인데 선후 (先後)가 뭐가 중요한가요?

어쨌든, 모든 주제에 대해 관심있는 모든 기독교 평신도들이 어디서나 자유롭게 토론하고 공유할 때 교회가 비로소 활기를 되찾게 되겠지요.  

 

  

제 침실 벽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이 걸려있는데, 조각상 <피에타> 역시 같은 작가의 작품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체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애통해하는 장면입니다.

 

하비 콕스의 책 <예수 허버드에 오다- 원제 When Jesus came to Harvard> 438 페이지에 보면, 이 피에타 조각상과 관련해 이 책의 저자가 느낀 '부활의 의미' 가 무엇인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현대판 피에타, 즉 엘살바도르에서 정부군의 총탄에 맞아 숨진 남자를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슬피 통곡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과 그 총탄 구멍에서 싹과 잎이 돋아나는 모습을 묘사한 포스터를 보고나서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문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요. 문학은 문학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와 과학은 역사와 과학으로 받아들일 때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사복음서는 역사와 과학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신앙고백문학 입니다.

 

평신도 여러분

 

메타노이아!! 

 

그리스어로 '마음을 바꾸라'는 말 입니다.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미몽과 고정관념에서 깨어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하라' 는 말로 잘못 번역되어 마치 '죄를 뉘우치라'는 말인 것 처럼 오해되고 있는 이 선언은 예수 선생의 스승이기도 한 세례 요한이 처음 한 말이지요. 

 

예수 선생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별로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와 가깝게는 한신대에서 중용을 가르쳤던 김용옥 선생이 자신의 저서 <요한복음 강해>에서 상당히 긴 부분을 할애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영화 대사 가 하나 생각나네요.

 

"그들의 권위의식과 자신감 넘치는듯한 눈동자에서 언제나 두려움의 그늘을 발견하곤 하지......" 

 

누가 한 말인지 기억 나시나요? 

 

영화 색계에서 이(양조위) 가 왕치아즈 (탕웨이)에게 한 말이지요. 

 

여기서 그들이란 패전을 눈 앞에 둔 일본군을 두고 한 말 입니다.   

 

 

 

 

 

누군가의 제명을 주장하는 그 너절함 뒤에는 역시 이런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제명이나 강퇴 같은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일탠데, 그 분노의 동기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느끼는 두려움일 테니까요.     

 

Take it easy

 

And,

 

Metanoia!!

 

 

 

유튜브는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