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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빼돌린 놈들을 찾아내라!

sarnia 2011. 7. 4. 15:35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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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이 글에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가미하여 제가 임의로 상황을 재구성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보도된 자료들을 토대로 <사실>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연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재구성했으나 관련자들의 <대사>나 디테일한 상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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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26 일 아침,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소재하고 있는 동아일보 사옥 주차장에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을 가득 태운 승용차 세 대와 미니 밴 한 대가 들이닥쳤다. 승용차와 미니 밴 안에서 쏟아져 나온 사내들이 본관 출입문을 향해 몰려오자 회사보안요원들이 급히 달려 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운 날씨인데도 가죽점퍼를 차려 입은 40 대 사내가 잠자코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안요원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이었다.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원 23 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사건 때문에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이 날, 서울중앙지검 공안 1 부 수사관들은 신동아 취재기자와 동아닷컴의 메일계정이 보관돼 있는 동아일보사 전산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하려다가 회사보안요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몰려나온 기자들과 신문사 직원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일단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검찰이 신문사를 수색하려 한 이유가 황당했다. 어떤 기사에 대한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해서 출동했다는 것이다. 두 달 전쯤 발간된 신동아 6 월호에 실린 <박근혜 X 파일>에 관한 기사가 문제였는데, 이 기사에는 박근혜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전 구국봉사단 명예총재에 대해 수사했던 수사책임자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었다.

 

sarnia 도 그 신동아 인터뷰 기사를 읽어봤지만 기사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중 극히 일부를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빌려 기사화한 것뿐인데, 그나마 박근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최태민에 대한 정보도 하나마나 한 맥 빠진 소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언론탄압이라는 말썽이 일어날 것을 무릅쓰고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아 동아일보사에 들이닥친 것일까? 더구나 당시는 참여정부가 집권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검찰은 <신동아> 6 월호에 나온 기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보원 직원이 <박근혜 X 파일>과 관련된 수사기밀 중 일부를 그 기사를 쓴 신동아 기자에게 넘겨 준 정황을 포착하고 국가정보원 직원의 <기밀누설혐의>를 수사하기 위해 신문사 전산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려 한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신동아 기자에게 전달했다는 수사파일은 언제 작성된 것이고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긴 파일이길래 검찰이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전산실을 뒤지러 신문사까지 몰려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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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신동아> 압수수색을 시도한 그 날로부터 30 년 전인 1977 년 봄.

 

종앙정보부장실에 설치된 빨간색 경비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빨간색 경비전화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연결된 직통전화였다.

 

, 각하! 김재규 전화 받았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는 전화이니 당연히 대통령일거라 생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화가 난듯한 20 대 중반의 여자였다.  

     

부장님, 부장님이 뭔데 남의 <프라이버시>를 조사하고 다니는 거죠? 당장 그만두라고 지시하세요! 중앙정보부가 그렇게 할 일이 없나요?”

 

이 봐요, 큰 영애! 나는 다만……”

 

다만 각하의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상대가 자기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쏘아 부치고 전화를 끊어버린 데 대해 몹시 화가 난 김재규는 수화기를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 이런 X이 다 있어! 건방진 X”

 

그가 새삼스럽게 열이 뻗친 이유는 단지 방금 <큰 영애>로부터 얹잖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 영애>의 전화를 받기 십 여 분 전에 <지금 당장 안전국장을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받고 안전국장 백광현을 수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건설부 장관을 하다가 느닷없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을 받은 것은 작년 (1976 ) 이었다.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부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김재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민정수석비서관 박승규가 차나 한 잔 하자며 자기 방으로 불렀다. 민정수석실에는 경호실장 차지철이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있다가 아이고 김 장관, 아니, 이제 김 부장이지요. 축하합니다하면서 앉은 채로 너스레를 떨었다.

 

민정수석 박승규가 그에게 두툼한 노란 서류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최태민 파일>이었다. 1975 1 월경부터 어디서 <사기꾼 같은 목사 놈>이 하나 나타나 <큰 영애>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구국봉사단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재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고 있는데 그 규모와 원성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기업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건사회부를 앞세워 여성단체 등 관변조직까지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는데 <큰 영애>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영감태기 목사>를 결사적으로 싸고도는 바람에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박승규의 결론인즉슨, 자기가 운영하는 경찰비선조직으로는 이 작자를 조사하고 견제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중앙정보부가 이 문제를 맡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큰 영애가 맹목적으로 싸고 돈다는 최태민을 조사해 온 기관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제 1 대였다. 치안본부 특수수사대는 제 1 대와 제 2 대 두 개의 조직이 있는데 제 1 대는 대통령 친인척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조직이고 제 2 대는 고위공직자들의 비위를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이 두 개의 특수수사대는 명목상 내무부 치안본부 형사국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치안본부 형사국장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의 지휘를 받으며, < 2 >는 사정담담비서관에게, < 1 >는 민정수석비서관에게 각각 직접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말이 경찰비선조직이지 대통령특명사건을 다루는 청와대 직속 암행어사 팀이나 다름없었다.     

 

이 두 개의 조직 중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하고 감시하는 < 1 >는 종로구 사직동에 본부를 두고 있으므로 일명 <사직동팀>으로 통했다. 큰 영애와 최태민의 문제를 내사해 온 조직이 바로 이 <사직동팀>이었는데, 이 사직동팀을 지휘해 온 민정수석이 <큰 영애> 등쌀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그 동안 수집해 온 내사자료와 함께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신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서 떠 넘겨 버린 것이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제 6 국장 (안전국장) 백광현에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부터 <최태민 파일>을 넘겨 받아 조사를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안전국장 백광현은 수사팀을 꾸린지 두 달도 안 돼 최태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의 비위혐의 목록을 작성해서 김재규에게 보고했다.

 

최태민 혐의: 횡령 14 , 사기 1 , 변호사법 위반 11 , 권력형 비리(기업 등으로부터 금품갈취) 13 , 이권개입 2 , 융자간여(금융거래법 위반) 3 건 등 모두 44 건 외 성추문 12                     

 

최태민은 1912 5 5 일 생으로, 이 내사보고서가 작성된 1976 년 기준으로 64 세였다. 경력이 희한했는데, 조금 늦은 나인인 1926 년 보통학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년경부터 해방 당시까지 주재소 순사 (일본 경찰)를 했다. 해방 후에는 비공식 군부대 문관을 했는데, 그만 둔 이후에는 절에 들어가 스님행세도 했고, 대전에 가서 인근 점집 무당들의 존경을 받으며 <도사>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영생교를 창립해서 신도 300 여명을 모아놓고 교주 노릇을 하다가 슬그머니 목사로 전업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호적상 개명을 한 번 한 것을 비롯해서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이름을 바꾸었고, 결혼 역시 여섯 번 했다.

 

최태민은 1974 8 15 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 당해 사망하자 이듬해인 1975 1 <국모님이 꿈에 나타나 장래 나라에 큰 일을 할 큰 딸을 도와주라고 하셨다><큰 영애>에게 편지를 연달아 세 통을 보냈는데 그 편지 세 통을 연달아 읽은 <큰 영애>가 감동을 받았는지 아니면 계시를 받았는지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들이더니 그때부터 둘이 함께 붙어 다니면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당시, 1976 년 이미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보고됐다. 비위사실 중에는 <큰 영애>의 파워를 빌린 최태민이 국세청에 압력을 넣어 <구국봉사단 성금납부>에 비협조적인 기업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는 내용과 그런 기업들 중의 하나인 대한농산()의 양곡도입권을 박탈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보고들이 올라왔을 때만해도 박정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중앙정보부가 그런 것까지 조사하느냐> 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1977 년 봄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백광현 조사팀><큰 영애>와 최태민의 권력남용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정 내사팀은 사직동팀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해 올린 게 분명했다.

 

박정희는 그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격노했고, <큰 영애>를 보좌하고 있는 청와대 제 2 부속실장에게 엄명을 내려 지금 당장 <큰 영애>를 데려오라고 호령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도 전화해서 지금 당장 조사책임자인 안전국장 백광현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큰 영애>는 청와대 제 2 부속실장으로부터 사태의 전말을 보고 받고 분에 못 이겨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서재로 가기 전에 아버지 집무실에 설치된 직통전화를 이용하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쏘아 부친 것이었다.

 

박정희가 그들을 한 날 한 시에 모두 불러들인 것은 이른바 <친국>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날 친국의 결과는 의외였다. 이 사건 자체를 그대로 덮어버린 것이다. 이후 <최태민 조사>는 중단됐고,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이 사건은 더 이상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날 <친국장>인 청와대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단 네 명뿐이었다. 대통령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중앙정보부 안전국장 백광현, 그리고 <큰 영애> 가 그들이다.

 

그로부터 2 년 후 10.26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의 <백광현 보고서> 사본은 10.26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 김재규에 의해 재미교포 언론인 손충무에게 전해졌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1980 4 14 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게 된 전두환은 비로소 이 사건에 대한 전설적 내막을 보고 받고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국장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처장 이학봉에게 이 사건 재조사를 명령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소하지 않고 다만 최태민을 강원도 소재 군부대에 약 1 년 간 연금해 前<큰 영애>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탈법적이고도 이상한 행정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에 대한 마지막 조사는 노태우 정권 때 이루어졌는데 이 때도 조사가 도중에 흐지부지됐다. 이 때는 前<큰 영애>가 그녀의 동생 박서영과 육영재단을 놓고 재산권 분규를 벌이는 과정에서 1990 11 월경, 박서영이 노태우에게 <제발 언니를 최태민의 마수에서 떼어놓아달라>는 황당한 탄원을 하면서 조사가 시작됐었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2007 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간의 <BBK 對 최태민파일> 진검 결투과정에서 잠깐 대두되었었다. <신동아> 가사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담당 기자가 간이 작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데스크가 압력을 받았는지 기사 자체는 별 내용이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2007 7 26 일과 27 일 양일에 걸쳐 검찰이 찾으려 한 <X 파일>은 이른바 1977 년 봄 박정희에게 건네졌던 <백광현 보고서>의 사본이 그 이후 수사과정에서 보강된 <박근혜 X 파일>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 검찰이 백주대낮에 체면불구하고 <보물지도>찾는 해적 떼처럼 신문사에 난입하려다가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해괴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국정원의 누군가가 그 파일을 기자 또는 다른 취재원에게 넘겨주었을까?

 

넘겨주었다면 그 파일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박정희가 격노했으며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아마도 이건 대선 후보로 나설 당시의 <큰 영애>가 반드시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분명해 보인다.

 

2011-07-03 (MST) sarnia

 

    

 

아래 두 사진은 퍼 왔다. 위 사진은 1966 년 호주, 뉴질랜드, 하와이를 방문하는 길에 서사모아에 내린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큰 딸 박근혜. 당시 성심여자중학교 2 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75 년 어느 날 당시 <큰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