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조카야, 정말 미안해

sarnia 2010. 3. 22. 10:16

언제부턴가 일요일 아침에는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사 들고 스타벅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그 책도 내가 가져 온 게 아니고 스타벅스가 들어가 있는 Chapter's 서점에서 가져온 것이다.

 

커피는 스타벅스보다 맥도널드의 Roast Coffee가 입맛에 맞아서고 소파는 스타벅스 것이 훨씬 푹신한 게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ㅎㅎ 혹시나 해서 사진있나 찾아봤는데 역시나 있다. 맥도널드 커피를 가지고 Chapter's 에서 책을 한 권 뽑아들고 스타벅스로 가는 도중에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아마 작년 가을에 찍은 것인 듯 하다.  

 

스타벅스에 약간 미안하니까 자리 값으로 cheese cake 하나 사 주는데 우리 동네 스타벅스의 장점은 대형 서점인 Chapter’s를 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건 스타벅스의 비즈니스 전략이기도 하지만 손님들이 자리에 퍼 질러 앉아 얼마나 오랫동안 먼 지랄을 하든 staff 들이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타벅스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Chapter’s 서점의 International Travel Section 에 가서 보면 태국에 관한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나라별로 분류하면 아마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쯤 될 것이다. 캐나다에서도 그 먼 나라까지 많이도 가는 모양이다   

 

 

근데 오늘은 안 갔다. 좀 기분이 꿀꿀해서……

 

아침에 뭔가를 찾다가 지하실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내 여행용 숄더 백 안에서 웬 작은 화장품 곽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게 어디서 난 거지?” 하고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다듬어 보고 나서야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작년 가을에 한국에 갈 때 당시 고3 (지금은 대학 1 학년)짜리 조카에게 주려고 비행기에서 산 것인데 여태까지 잊어먹고 있다가 오늘에야 발견한 것이다.   

 

SK-II 라는 상표의 아이크림이다.

 

작년에 태국에 다녀 온 뒤 한국에 들러서는 또 4 일 간 국내여행을 했다. 그렇게 싸 돌아다니면서 그냥 잊어 버린 것이다.

 

10 21 일 수요일 날 캐나다로 돌아가는 데 출국날짜가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월요일 오밤중에야 조카 생각이 났다.

 

조카 여섯 명 중 다섯명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살고 있고 그 아이만 유일하게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비록 매년 갈 때 마다 보긴 하지만 이번에도 한 번 만나고, 용돈도 좀 주고 오는 게 당연했다.   

 

집으로 걸까 하다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부랴부랴 리스트를 뒤져 그 아이 셀로 전화를 때렸다.

 

, 막내 삼촌 언제 오셨어요?”

 

명랑한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한다. 그 시간에 아직 학교에 있단다. 수능이 며칠 안 남아서.

 

내일 학교 제끼고 삼촌하고 같이 쇼핑갈까하고 물어보니까  “응, 그건 곤란한데……” 하면서 토요일 날 어떠시냐고 물어본다. …… 토요일에는 삼촌이 한국에 없는데……

 

. 내년에 또 오니까 그 때 보던지, 아니면 내년 여름에 삼촌한테 한 번 놀러 와도 좋고……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인데 조카와 전화를 하면서도 걔 주려고 아이크림을 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내 서울 숙소가 동교동이고 걔 학교는 경희대 근처라 좀 멀긴 하지만,

 

내가 그 때 조카 주려고 비행기에서 그 아이크림을 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면 아마 그 선물을 전달한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 아이를 찾아갔을 것이다.

 

동교동에서 휘경동이 멀다고 조카도 보고 오지 않은 주제에 도대체 캐나다에서 태국까지는 뭘 보겠다고 또 간다는 건지…… 그냥 스스로에게 좀 한심해져서 그냥 오늘은 집에 죽치고 있었던 것인데,

 

그냥 집에 있기도 심심해서, 또 새삼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조카에게 태국 이야기를 멜로 보내려고 작년에 쓴 여행기를 몇 개 추려봤다.

 

가만히 읽어보니 뭔 여행기에다 정치적인 소리들을 그렇게 잔뜩 늘어놓은 것인지 내가 봐도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사족들 솎아내고 추려내고 다시 엮으려다 보니까 쌩으로 여행기를 새로 쓰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어쨌든 오늘은 그렇게 일요일 하루를 바쁘게 보냈구만……       

 

뭐, 어쨌든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5 개월 전에 구입해서 오늘에야 발견한 그 아이크림은 어떻게 처리할 까 고민했는데,

 

올해 한국 갈 때 조카에게는 당연히 새 선물을 사다 주는 게 도리고,

 

와이프한테 주자니 ‘이 인간이 곧 죽으려고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나’ 하며 머리를 짚어 볼 것 같고,

 

7 년 전 담배를 끊었을 때 남아있던 담배보루를 모두 노숙자에게 주어버렸던 일이 생각나서, 다운타운으로 나가 어느 여성 노숙자에게 주고 올까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좀 그렇고,

 

결국 그냥 내일부터 내가 사용하기로 했다.

 

사용법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검색해 보지도 않았는데, 우선 면도용 크림으로도 사용해 보고, 용기가 아주 작으니까 비행기타고 어디 갈 때 핸드크림 대용으로 Flight Security Bag에 넣고 다녀도 안성맞춤이고, 아이크림이라니까 가끔 눈 밑에도 대충 찍어 발라 보고, 뭐 그러면 될 것 같은데…… 

 

혹시 어떤 사연으로 아이크림을 사용해 보신 남자분들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