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다웠던 토론

황춘득 목사님의 반론을 겸허하게 수용하며

sarnia 2009. 12. 27. 14:11

고 황춘득 님과 가장 어려웠던 토론을 시작하며 올렸던 첫 글(2009 년 2 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8 년 전쯤 자동차를 몰고 캘거리에서 토론토까지 약 4 km를 달려가면서 참 많이 듣던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 넣어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들으니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과 바다 같은 호수 수피리얼 레이크가 떠 올라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낍니다. 어울리지도 않고 한국어 가사라 본문과 상호 충돌할 수 있어 주저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넣습니다.    

 

황춘득 목사님의 결단에 경의를 표합니다. 교역자의 입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한 논의에 참여하기로 결단하신 동기 중에 제 무례가 포함돼 있다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님이 주신 배경음악 중 첫 곡은 작년 5 월 제가 누군가를 과외 공부시킬 때 넣었던 곡인데 오늘은 그 영광에 대한 보답으로 제가 기꺼이 그 곡을 받겠습니다. 대화가 통하는 분과 토론다운 토론을 할 수 있고 제가 많이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잇습니다.

 

진보수구꼴통이나 원리주의자라는 지적은 최근에 올린 몇 편의 글들만 보더라도 던지실 수 있는 비난이니 제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역자의 처지에서 신학교 강의실에서와 교회강단에서 각각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닌, 일관된 자세로 자기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교역자가 계시다면 저 같은 평신도가 더 이상 이 게시판에 나타나서 많은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나타나서 질문 정도는 하겠습니다)

 

마녀사냥꾼들이 아무데나 마구 쏘아대는 포탄의 화약냄새가 도처에서 진동하는 한국 교회(기장 포함) 현실에서는 존경할 만 하지만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무모한 일이라, 교역자도 아니고 한국에서 살지도 않는 제 주제를 생각해서 교역자의 이런 결단을 요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황 목사님은 교역자이면서 무예인인 동시에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롱과 속된 표현 역시 토론의 고비에서 필요한 소통수단의 한 장르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소통은 단지 긍정적인 이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자극과 압력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올린 제 답글은 황 목사님이 올리신 TED 강연에 대한 것 이 아니라 (말씀드린대로 컴 문제로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에 대한 제 평소 생각을 간단하게나마 편 것 입니다. 사실 이 토론방에서 제가 도킨스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기가 부담스러웠는데 모처럼 그에 대한 게시물을 올려주셔서 제가 물타기를 좀 했습니다. 강연조차 듣지 않고 한 물타기라 매우 실례되는 짓인 줄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비록 제가 한 짓은 상스러웠더라도 혹시 제 상스러운 짓이 황목사님이 중대한 결단을 하시는데 한 동기를 제공했다면 그 상스러운 짓조차 역사가 굴러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자위해 보고 싶습니다.       

 

다만 펠라기우스 사태로 돌아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라는 질문과 이 질문의 앞 뒤에 표현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우리 식으로 말하면 구원의 문제라는 문장으로 미루어 볼 때, 황 목사님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구원론의 입장을 분명히 지지하시는 입장의 토대를 바탕으로 이 위험한 논의에 참여하시겠다는 것으로 저는 일단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일단 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직 황 목사님의 구원론을 제가 접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놀랍게도 도킨스 강연을 올려 주셨으니 저도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현대 과학이 제공한 자연과 우주의 세계, 그리고 차원 및 시, 공간에 대한 이해는 종교에 대한 신앙인들의 생각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컴 문제로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데 도킨스는 이 강연에서 상식적이지만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과학은 기술에게 보다는 상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말 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이야기들 (지구의 자전과 인간의 지각 인식, 물 분자수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방광 수, 양자역학, 고체의 밀도 등등) 2006 년에 출판한 ‘God Delusion’ 이라는 저서에 나와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장 상식적인 이 말이 오늘은 제 뇌리 속에 가장 선명하게 들어와 박히는 것을 느낍니다.

 

그가 말하는 과학이 영향을 미친 상식이란 철저하게 유물론에 바탕을 둔 인식의 세계라는 것을 아실 것 입니다. ‘우리가 고체를 딱딱하게 느끼는 것은 그 고체 자체가 딱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만지는 손이 같은 고체이기 때문에 서로 통과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코자 뇌의 지각장치가 그 환경에 맞게 진화되어져 왔다는 사례제시는 아주 그다운 재치입니다. 저는 이 이론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 이론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사고의 세계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물질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 할 것 입니다. 그리고 다른 환경을 이루고 있는 물질계에서는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법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지나칠 수 있습니다. 

 

도킨스가 그의 저서에서 밝혔듯 전 시대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역시 신학적 개념으로서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가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는 말을 한 것은 무신론자를 용납하지 않는 미국 사회의 기이한 풍습 때문인데, 결국 그는 내가 지금까지 종교에 대해 한 말들은 다 거짓말이고 내 안에 종교적인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과학으로 밝혀 낸 세계에 대한 무한한 감탄과 경외 뿐 이라는 고백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물리학 등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시대현상을 바라보는 통찰과 종교다원주의(문화현상의 일부로서의 종교든, 신앙인의 실존적 고민으로서의 종교든)를 다루는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목사님의 생각(목사님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표현을 하셨지만)을 원칙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과연 전통적 그리스도적 구원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다원주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우주물리학이 논하는 차원의 문제에서 어떤 교훈을 얻으셨는지는 좀 궁금합니다. 잘 이해도 되지 않고요. 경이로운 창조주의 섭리 앞에 모두 겸손해 질 뿐 아니라, 사고의 패러다임도 바꾸자는 교훈 이외에 다른 것을 취하셨는지 질문 드리는 것 입니다. 

 

도킨스를 비롯한 주류과학자들은 철저하게 인본원리를 따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이 생존하고 진화할 수 있는 골드락스라는 가는 띠가 지구의 공전궤도와 불과 수 백 킬로 미터 오차 범위 안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인식하면서 창조신화 신봉자들은 창조주의 섭리를 찬탄하지만 과학자들은 생명을 지탱하는 골드락스 값을 계산하고 그 골드락스 값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 원소들이 어떠한 화학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져 나가는가를 차례로 계산해 나갈 것 입니다. 그 인식과정이 창조신화신봉자들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로 사물을 인식해 나가는 방법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으실 줄 압니다.

 

사고의 패러다임은 독립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개별 인간의 사고나 이념의 토대와 항상 같이 움직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신이 없다는 광고를 하면서 ‘probably’라는 단어를 집어 넣었습니다. 이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변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자연과 우주를 인식하는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신앙인들의 사고의 패러다임만 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무신론자들의 사고 패러다임도 함께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킨스가 강연에서도 말했듯이 양쪽 모두‘simple confidence’를 가지고 진리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물과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뜻일 겁니다. 무신론자들과 주류 기독교인들의 사고의 지평은 10 , 20 년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처럼 빠르게 가까워 지고 있습니다.

 

제가 두 문단 전에 목사님께 질문 드린 요점은 지평융합은 아니더라도 과학의 발전에 따라 무한소를 향해 가까워 질 다양한 종교와 문화간의 인식 패러다임속에서, AD 4 세기 로마 권력의 패러다임으로부터 탄생했고 그 후 1600 년이 지나도록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전통적인 구원론이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재해 나갈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것 입니다. 제가 보기에 도킨스를 비롯한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무신론자들은 적어도 그들 나름의 ‘simple confidence’를 포기하고 인격신이든 자연신이든 초월적 존재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열어놓을 마음의 준비가 된 것도 같은데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의 구원론자들은 어떻습니까?

 

저는 자연과 우주의 경이를 바라보면서 진리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열 수 밖에 없다는 겸손함(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는 그런 개념이 아닌)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우주를 구성하고 잇는 모든 물질(원자 양자든 그 융합체이든)들은 끊임없이 상대와 환경을 실험하며 스스로 변화하고 진화해 나간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리고 20 년 전의 내가 정신적으로는 거의, 물질적인 원소는 한 올도 빠짐없이 완전히 교체된 다른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생명과 우주 원리의 작합성에 경외심을 느낍니다. 관계와 실험을 통해 부적합성을 끊임없이 털어내면서 최고선을 이루려는 생명과 우주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창조주의 섭리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까 그 답글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도킨스가 진화생물학과 집단유전학, 그리고 그 분야의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남긴 과학철학적 문제제기는 경탄할만한 것 입니다. 그러나 종교(특히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 분명한 적대적 공세를 가하면서 동원하는 성서해석 방법은 대단히 잘못된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황 목사님이 오늘 제기하신 문제와는 다른 주제지만, 그의 강연에서 어떤 교훈을 취하셨다면 그 사람의 신학-종교학적 관점도 같이 다루면서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