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은 대표적인 반동 작곡가다. 반동 지식인의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역시 해방전에는 친일 지식인이었다. 해방 전후를 막론하고 그가 작곡한 노래들 중 상당수는 수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 몰기 위한 선전도구로 기능했다.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있는 ‘전선야곡’을 비롯하여 ‘전우여 잘 자라’가 그랬고, 태평양전쟁 당시 나온 ‘아들의 혈서’라든가 ‘결사대의 안해(아내)’ 따위의 작품들이 그랬다. ‘결사대의 안해’는 조명암의 다음과 같은 시(詩)에 박시춘이 애조 띤 일본풍의 곡을 단 작품이다.
한 목숨 넘어져서 천병만마의 길이 되면
그 목숨 아끼리오, 용감한 님이시여
이 안해는 웁니다. 이 안해는 웁니다.
감개무량 웁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패색이 깊어지기 시작한 1943 년 무렵, 수 십 만의 조선 젊은이들이 죽음의 남방전선으로 끌려가던 전국 기차역 광장에서는 박시춘이 작곡한 이런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선생은 무슨 얼어죽을......
이런 그가 해방이 되자 반동작곡가로 전업한 것은 예정된 코스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잽싸게 부산으로 튀어 내려왔다는 그가 생사가 갈리는 참혹한 전투장면 같은 것은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전쟁 중 북진통일 운운하는 시에 곡을 달며 젊은이들의 적개심과 살의를 부추켰다.
그는 시간이 나면 부산역 주변을 빌빌 싸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곤 했는데, 이 곳에서 서울에서 피난 왔다가 상경하는 애인을 붙잡고 목놓아 우는 경상도 아가씨를 바라보며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을 끄적거렸을 것이다. 가끔은 부두에 나가 벤치에 죽치고 앉아 양주를 까기도 한 모양인데, 이 곳에서는 부산항으로 후퇴해 온 미군 상륙정에서 쏟아져 내리는 파김치가 된 피난민들을 쳐다보며 ‘굳세어라 금순아’ 따위 의 곡을 연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작사-작시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역사의식이나 사회과학적 균형감각이 결여된 감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노래들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한국 가요계에 끼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이야기하며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여행기 쓰면서 긴 이야기 할 수는 없고, 이렇게만 결론을 맺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들은 자기의 양심과 인격, 그리고 사고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분한 지식과 재주를 가진 자들이다. 비범한 지식과 재주를 가진 자들은 그 양심과 인격 또한 평범하지 않고 비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그 지식과 재주에 걸맞는 사고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비범한 양심과 인격, 그리고 사고력에 의해 자기 관리되지 않는 지식과 재주는 아주 해로운 무기가 되어 작게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크게는 한 시대를 피비린내 나는 광기로 몰고 가기도 한다. 친일 지식인들의 공과를 구별하자고......?
엿 먹으라 그래. 차라리 노덕술은 용서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박시춘을 용서해서는 안된다.
나는 밀양에서 세 시간 가량 머물렀다
내가 밀양에서 박시춘을 마주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때 나는 아랑각 주위에 있었다. 도대체 아랑이 왜 자살을 했는지, 자살이 아니라면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 당한 건지, 죽은 뒤에는 진짜 원귀가 되어 밀양부사들에게 나타났는지, 혼자 이런 저런 추리를 해 가며 영남루 아래 있는 아랑각 주변을 배회하다가 생각지도 않게 그의 흉상과 생가가 있는 곳까지 나도 모르게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의 흉상과 생가가 밀양 영남루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뜻 밖의 수확이었지만 한편으론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마치 아랑낭자의 원귀가 나에게 저 친일파의 흉상과 생가를 자기 주변에서 치워달라는 암시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아랑의 사인(死因). 성폭행을 피하려다 자살하거나 살해된 게 아니라, 신분제도의 벽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한 게 아닐까? 아니면 사대부 가문 망신을 두려워 한 아랑의 집안에서 아랑을 명예살인하고 천한 신분의 유모와 사내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낸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아랑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갑작스럽게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다. 아랑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사당으로 불러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랑 변사사건. 시간을 내서 내가 재수사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유감스럽게도 점필재 김종직의 생가에는 가지 못했다. 영남루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는 바람에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곳들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시간에,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 때 지하에 있던 김종직이 관 속 시체의 목을 베이는 부관참시를 당했다고 배웠었다. 그런데 무오사화가 연산군 때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연산군이 일으킨 정변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요사스런 할망구 인수대비를 철천지 원수로 여겼으므로 그 할망구를 둘러 싸고 있던 훈구파의 경제기반을 흔들려고 노력했지 사림파에게는 별로 큰 원한이 없었다. 따라서 무오사화는 연산군의 권력기반이 아직 미약했던 시절,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형성된 정치권력과 인수대비가 꾸민 짓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연산군은 사대부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양대 사화를 통해 사림과 훈구파의 힘을 번갈아 약화시켜 왕권 강화를 시도할 정도로 비상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진짜로 원한을 가지고 밀어내고 싶어했던 세력은 사림파가 아닌 훈구파였고, 무오사화와는 달리 연산군 자신이 직접 주도한 갑자사화를 통해 이를 실천했다.
중종반정은 한 마디로 연산군에게 뒤통수를 맞은 훈구파의 반동 쿠테타였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일 연산군이 돈줄과 권력기반을 함께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세력을 상대로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로 귀착됐을까? 승자의 역사기록이 주절주절 나열하고 있는 소설같은 그의 악행보다 더 파렴치한 짓을 했더라도 왕위에서 쫓겨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조선사학자가 아니니 잘은 모르겠지만 혹시 연산군은 대명 사대주의를 지양하다가 보수주의자들의 의해 밀려난 광해군에 필적할 만 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을 가졌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점필재 선생, 그렇지 않소? 당신의 시신을 무덤에서 끄집어 내 목을 벤 그 무도한 자들은 연산군이 아닌 다른 인간들이지요?
기차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약산 김원봉이 살던 동네를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모레 부산에 가니까 그 때 부인 박차정 여사의 생가를 대신 찾아보기로 하고 내일동 상설시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찜 해놓은 유명한 돼지국밥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시간밖에는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오늘 도보여행을 한 거리가 아마 20 킬로미터 쯤 될까? 서울로 일단 철수하는 기차 안에서 한 장. 밀양에서 서울까지는 KTX로 정확히 2 시간 26 분이 걸렸다. 수요일이라 그런지 기차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이 빈자리는 동대구 역에 도착해서야 반 쯤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