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가 중국에 가는 이유

sarnia 2009. 5. 12. 15:42

올해는 중국에 간다. 물론 또 혼자 가는 자유여행이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고국방문 첫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대륙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인천에서 천진까지 배를 타고 가 볼까도 생각 중이다. 결정을 못하고 생각중인 이유는 딴 게 아니다. 언젠가 홍도에 갔을 때 격랑을 만나는 바람에 산더미 같은 파도 위에서 7 시간 동안이나 상하좌우로 출렁대며 혼찌검이 난 뒤로는 먼바다 선박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골든트라이앵글을 간다며 왜 마음이 바뀌었느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중국에 필이 꽂혀 결정을 바꾼 것뿐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5 일이다. 5 일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첫 번째 방문이니 북경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천진까지 배를 타고 간다면 북경까지는 기차로 2 시간 이내에 이동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가 가 보고 싶은 도시는 서안 또는 하얼빈-장춘이다. 시간상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할 것이다. 서안을 가든지 아니면 장춘과 하얼빈을 묶어서 가든지.

 

서안에 가게 되면 북경에서 기차를 타게 될 것 같다. 터콰이(特急) 루언워(軟臥) 요금이 약 400 위안 정도이니 호텔에 묵는 셈 치고 이 특급열차 침대칸을 이용해 야간에 이동하면 된다. 차비가 비싸 꿀림비(숙박비)를 절약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간을 절약하면서 동시에 몸을 축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안은 알다시피 중국 고대사를 경험할 수 있는 오래된 도시다. 그렇다고 내가 진시황이라든가 당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 같은 것이 궁금해 이 도시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옛날에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스토리는 다름아닌 장학량이 장개석을 무력으로 감금하고 국공합작을 설득한 사건을 다룬 대목이었다. 장학량이 병력을 동원해 장개석을 포위한 채, ‘모택동의 홍군과 내전을 벌이는 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을 먼저 하자고 눈물로 읍소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하극상에 해당하는 이 사건을 서안사변이라고 부르는데 공교롭게도 발생한 날짜가 한국의 12.12 사태와 같은 12 12 (1936 )이었다. 이 서안사변이 발생한 장소는 물론 서안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장학량은 제 2 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인물로 유명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그의 걸출한 사람됨이다. 그의 배경은 중국혁명의 본류와는 거리가 먼 군벌 출신이고 사상 역시 혁명가적인 진보사상을 가졌던 사람은 아니다. 북양대신 원세개 계열의 아버지 장작림-동북군벌-국민당-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1 100 세를 일기로 사망이라는 그의 약력 또한 그가 결코 혁명가는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사람에게 혁명가 이상의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의 정치적 위상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목숨 조차 가야 할 정도(正道)’ 앞에서 굳이 보존코자 하지 않았던 그의 남다른 행적 때문이다. 그는 장개석을 제거하고 국민당을 접수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개석을 사살하는 것에 대해 당시 그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홍군의 주은래와 코민테른이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외부세력의 반대에 따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장개석으로부터 선()항일투쟁 약속을 받아 낸 뒤로는 자기의 목숨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장개석을 호위하며 그를 따라 갔다. 자기가 나중에 감금사건에 대한 보복을 받아 처형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투쟁연대를 위해 올바른 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는 전혀 다른 인간형인 장개석은 치사하게도 자기 관할구역으로 들어오자 마자 장학량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고 그를 마약중독자로 조작해서 폐인을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

 

역사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 그만하자. 아무튼 지금부터 자료들을 찾아 차근차근 다시 공부하고 유적지에 대한 검색도 세밀하게 해 나갈 작정이다. 다행스럽게도 서안사변의 현장은 역사현장으로 잘 보존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러고 보면 이른바 반동들의 사적지도 잘 보존해 주고 사상적으로 반대편에 있더라도 인간 됨이나 업적이 훌륭했으면 훌륭했다고 인정해줄 줄 아는 리더들이 존재하는 중국이 부럽기까지 하다. 정말 걸출했던 역사적 인물들의 사료들을 단지 그들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왜곡하거나 거짓말을 꾸며내 날조까지 해 온 대한민국의 친일수구기득권집단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장춘과 하얼빈은 여행의 2 차 후보지다. 북경에서 가게 된다면 역시 야간특급열차의 침대칸을 이용해서 왕복하게 될 것이다. 장춘과 하얼빈 사이는 기차로 3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장춘과 하얼빈에서도 만나 보고 싶은 역사 속의 인물들은 많다.

 

동양국가로서는 최초로 서구열강 중의 하나인 러시아를 격파해 인도의 사회주의자들조차 아시아의 영웅으로 추켜세웠던 이토오 히로부미의 최후의 순간을 보러 하얼빈 역에 갈 수도 있다. 그 곳에서 그를 저격 사살한 안중근 열사의 흔적을 찾아 볼 수도 있겠다. 만주국의 옛 수도 신징(지금의 장춘)에서는 누굴 만날까?  쪼다 같은 표정에 꺼벙한 안경을 쓴 푸인가 뭔가 하는 허수아비 황제를 만나 볼까?  

 

그런데 이 두 도시를 방문하고 싶은 진짜 이유는 어떤 구체적인 역사 속의 인물을 만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아직도 진동하고 있을 현대사 저 편에서부터 풍겨 오는 피비린내를 한 번이라도 직접 맡아보고 싶어서다.

 

장춘과 하얼빈. 당시 일본 육군 야전군 중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침략전쟁을 수행한 관동군이 남긴 피비린내의 흔적들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도시들이다. 나치의 SS 가 운영했던 concentration camps 들과 비교해 그 잔혹성에 있어서 뒤질 것이 없었던 unit 731 에 대해 미국놈들은 왜 그렇게 관대했는지 이유를 잘 알 수 가 없지만, 조선의 독립지사든 팔로군이든 러시아 인이든. 인간은 고사하고 동물이라도 그렇게 당해서는 안 될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갔던 현장을 갈 수 있을 때 가서 한 번쯤은 가서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다.     

 

, , 내가 기왕 거기까지 가게 되면 간 김에 잠깐 만나 줄 수도 있는 인물이 하나 더 있기는 있다. 그런데 그 인물은 앞 서 등장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보 잘 것 없는 인물이라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어쨌든. 

 

이렇게만 소개하겠다. 서안의 장학량이 명분과 정도를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내 던질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만주에서 내가 잠깐 만날 줄지도 모를 그 보 잘 것 없는 사람은 거꾸로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 출세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했던 사람이다. 평범하지도 않지만 별 볼일 역시 없는 사람이라 이름도 이제야 생각났는데, 다카키 마사오라는 관동군 청년장교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지금의 장춘에 있는 신징군관학교에 지원할 때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는데, 느닷없이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고 충성을 다해 천황폐하께 보답하고 목숨을 바쳐 일본을 받들겠습니다라며 미친 놈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입학이 허용됐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앞에 열거한 인물들 중 이토오 히로부미와 다카키 마시오가 공통점이 있기는 하네. 끝 수가 아홉 수인 해 같은 날 (10 26 ) 같은 방법 (권총저격)으로 사살됐다는 점. 천생연분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 ! 재수없는 다카키 마사오 이야기는 그만 하고.

 

가는 방식은 작년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대한항공으로 간다면 서울 스톱오버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항공권을 구입해서 갈 것이고, 에어캐나다로 가게 되면 인천-북경 구간은 에어로플랜마일로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을 구입할 것이다. , 참 배타고 가는 걸 생각 중이라고 했지. 글쎄, 배 여행은 취미가 없어서 아무래도……      

 

그나저나 북경-서안, 또는 북경-하얼빈의 특급열차 침대칸이 4 인실이라니, 동승객을 잘 만나야 하는데……

 

여담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내가 선호하는 옆자리 승객의 역순위는 다음과 같다. 가장 골 때리는 경우는 멀미를 하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 내가 환자 병수발을 하면서 여행해야 하는 경우다. 두 번째로 재수없는 경우는 상대방의 기분에 아랑곳없이 입을 쉬지 않고 놀려대는 talkative 스타일이 옆에 앉는 경우고, 그 다음이 어린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타는 엄마, 남자 승객, 여자 승객, 좀 더 젊은 여자 승객 순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는 경우 나는 check-in 할 때 반드시 카운터 직원에게 옆자리가 occupied 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점령돼 있으면 두 말하지 않고 옆자리가 아직 예약돼 있지 않는 자리로 좌석을 변경해 달라고 부탁한다. 만석이 아니라면 middle row 의 복도 쪽 좌석의 옆자리가 대체로 끝까지 비게 될 확률이 높다.     

 

문제는 언어다.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어가 통하지 않기로 유명한 나라다. 중국어를 못하는 자유여행자에게는 치명적인 문제다. 한자로 간단한 필담은 가능할 테니 종이와 펜을 준비해 가면 좀 도움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