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사이트에서 토론토 지갑 이야기를 소개했더니 어느 목사님이 반론을 하셔서 제가 다시 재반론을 한 적 이 있습니다. 깊이 있는 토론은 아니었지만 잠깐 소개하고 지나갑니다.
토론토스타가 최근 재미있는 실험을 했군요. 지갑 20 개에 각각 43 불 77 센트 (약 4 만 8000 원)와 debit card 아이사진, 신분증, 연애편지 등을 집어넣고 토론토 다운타운 곳곳에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이 중 몇 개가 돌아올까 궁금했던 것이지요.
몇 개가 온전한 상태로 돌아왔을까요?
‘잃어버린 지갑 20 개’ 중 뒤늦게 돌아온 2 개를 포함, 모두 17 개가 돌아왔습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이 도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영어가 아닌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민자 도시입니다. 군사독재시절에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해외본거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auto industry등 제조업이 밀집해 있어 세계불황의 가장 심각한 직격탄을 맞고 있는 온타리오 주의 수도이기도 한 이 도시의 양심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 준 셈 입니다.
지갑을 살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갑 속에 남겨 놓은 전화번호 등으로 메시지가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답신을 보내지 않자 지갑 취득자들은 몇 차례씩이나 메시지를 남겨놓는 노력을 했답니다. 어떤 학생은 지갑 속에서 발견한 포토아이디의 사진 속 얼굴 임자를 찾으려고 주변을 반 시간 가량이나 빙빙 맴돌았다고 하지요. (성이 Song 인 걸로 봐서 아마 한국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폴 다웰이라는 한 부동산 업자는 온타리오 호숫가에서 발견한 지갑을 수소문 끝에 자기가 주인(실은 주인역할)을 직접 만나 전해 주기도 했구요.
이 신문의 사회윤리담당 칼럼리스트는 이전에도 비슷한 실험을 한 모양인데 “달랑 현금과 연락처만 들어있는 지갑보다는 사진이나 편지 등 어떤 개인의 personal 한 흔적이 남아있는 지갑이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말합니다.
토론토스타는 돌아온 현금 모두를 지갑을 찾아 준 사람들의 명의로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밝혔습니다.
제가 10 년 전쯤 토론토를 방문했을 때 거기 사는 지인에게 이런 농담을 한 적 이 있습니다.
“여기가 사람 사는 데냐?”
깨끗하게 정돈된 서부의 작은 도시에 살다가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무뚝뚝하고 어디 가나 사람에 치이고 거기다가 여름에는 한증막처럼 푹푹 찌기까지 하는 도시 토론토 사는 친구를 놀려 주려고 한 말 이지요.
거기 사람 사는 데 맞네요.
아울러 한마디 더.
“토론토, 참 잘 했어요”
위 의 제 글에 대한 어느 교역자의 답글
그 도시에 다원주의가 뿌리내리니까 지갑을 신고한 게 아니고 옜적에 교회신앙의 흔적이 아직 문화 속에 좀 남아 있어서그런 것일 것입니다. 다원주의는 정직하게 만들기 보다 혼미하게 만들고 넋을 잃기 직전까지 데려 갑니다. '자기'라는, 요즘 흔히 말하는 '정체성'이란 것을 잃고 헤메도록 말이죠..
다원론이 불신자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딱이지요 . 그 분들의 시각으로는 다원 혼합이 썩 신사적이고 고상합니다. 모든 종교가 한 뿌리니까 사이좋게 지내고 싸우지말자는 달짝지근한 주장이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아무 길로 올라가거나 정상에만 가면 다 만난다는 배경음악 까지 결들인 하모니를 들으면 감미롭지요.
하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유혹에 속지않습니다. 왜냐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기 때문이죠.
이 글에 대한 제 재반론
토론토스타 紙의 지갑실험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표본수량(20 개)이 너무 적어 사회학적 실험으로서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데다 지갑 속에 40 여 불이 아닌 400 여 불을 넣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이죠. 개인의 정직도란 개인 간의 차이보다는 한 개인이 맞닥뜨린 ‘유혹의 강도’에 따라 마음 속에서 진동하는 그래프의 변동폭이 더 클 수가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어느 개인의 마음속에서 진동하는 그래프의 변동폭을 진정시키고 될수록 steady 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적 요인들을 제대로 발굴해내는 것이야 말로 사회학의 핵심과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000 님이 추측하신 ‘기독교문화잔재론’ 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첫째, 토론토는 그 인구분포상 기독교문화의 잔재가 의식의 저변을 지배하는 사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광역 토론토 전체도시인구 5 백 70 만 명 중 절반이 좀 넘는 2 백 40 여 만 명이 비(非)유럽계일 뿐 아니라 전체 인구의 3 % 정도만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번 실험에 반응한 사람들의 출신 배경 분포가 이 도시의 인구분포와 대체로 비례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다만 캐나다에서는 이런 종류의 실험결과를 ethnic group 별로 구분해서 발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알려진 성(surname)등으로 미루어 보면 그렇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높은 정직도가 골고루 분포하고 있는 현상의 중요한 요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 중요한 요인을 찾아 보기 전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밴쿠버 캘거리 에드먼턴 시내를 운행하는 전철역에는 개찰구나 출찰구가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냥 타고 다닐 수가 있지요.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돈을 내고 표를 삽니다. 가끔 무임승차를 하다 적발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이들은 모두 비기독교인들 일까요. 하다 못해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쁜 놈과 좋은 놈의 비율은 문화권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비슷비슷하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좋은 놈과 나쁜 놈의 비율은 문화권이나 종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여 사는 공동체의 꼬라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이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문화권이나 종교가 아니라 그 개인을 학습시키고 있는 환경 즉 소속집단의 성격과 그 집단에 소속된 개인들이 과연 얼마나 그 집단에서 합의하고 있는 norm 과 morality를 신뢰하고 존중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겠지요. 쉽게 말해 똑같은 사람이라도 전두환이나 무가베 같은 인간이 통치하고 있는 사회에서 살아갈 때와 자기가 공정하게 존중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때는 그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합의의 내용, 즉 norm 이나 morality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그 norm 과 morality 에 반응하는 행동양식 또한 달라지겠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저는 높은 정직도가 골고루 분포하고 있는 요인으로서 개인과 그 개인이 소속된 사회집단간에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높은 사회적 연대의식을 꼽고자 합니다. 사회적 연대의식이란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런 의미로서의 사회적 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대체로 착하면 덩달아 자기도 온순해 지는 일종의 동화현상 같은 것이죠. 양보를 받았다면 양보를 해 주고 싶고 상대가 나에게 자기 종교를 설명만 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들어주려고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 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자기 신념과 다르다고 오밤중에 현수막(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이나 몰래 훼손하는 수준의 윤리감각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한 공동체의 ‘꼬라지’를 만들어 나가는 데 어떤 형태로 기여를 할 지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정직하지도 않고 관용적이지도 않은 이런 사람들이 어떤 도시 시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긴장과 적대감을 유발하고 있다면 기독교 아니라 기독교 할애비 문화 잔재가 널널하게 남아 있어도 그 도시는 하루아침에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 입니다. 아닐 것 같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