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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자유여행기 (방콕 뒷골목 이야기)

sarnia 2008. 11. 30. 09:40

이 여행기는 15 세 미만의 청소년이 읽기에는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돼 있으므로 보호자의 읽기지도가 필요합니다.

 

수안나품 국제공항

 

창 가리개를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고도가 낮아졌는지 지상의 불빛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예정대로라면 35 분 후에 도착이다. 모니터에는 비행기가 이미 방콕 상공에 들어선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의자 등받이를 바로 하고 독서등을 켰다.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책을 읽으려고 reading glasses를 꺼내려다 그만 두었다. 독서등을 다시 끄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시차가 바뀐데다가 에드먼턴에서부터 통틀어서 무려 19 시간 가까운 비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 하룻밤 스탑오버를 한 것은 아무래도 잘 한 일 같았다.

 

에드먼턴을 출발한 게 어젠지 그젠지 기억마저 가물거린다. 갑자기 에드먼턴 공항 에어캐나다 카운터에서 본 뚱뚱한 중국계 아줌마 직원이 생각났다. 내 여권과 e-ticket를 번갈아 보던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가방이 아주 가볍네요” 

 

두 주일 일정으로 한국과 태국을 다녀올 장거리 여행자의 가방 치고는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빈 가방이니 가벼울 밖에. 아무 말 없이 미소로 답해 주며 여권과 e-ticket을 돌려 받아 어깨에 매고 있던 숄더 백 안에 집어 넣었다. 카메라 가방 크기의 숄더 백 안에는 책 두 권, 카메라, Travel Pack, 휴대전화, 필기도구, 여행에 관련된 바우쳐 쿠폰 지도 등 종이조각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여행 다닐 때 짐을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도 하지만, 여행을 빈 손으로 출발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캐나다에 비해 물가가 저렴한 태국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해 쓸어 담아 올 요량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부자들이 부자나라에 가서 비싼 물건을 사 들고 오는 건 잘하는 짓이 아니지만, 부유한 나라에 살면서 그보다 덜 부유한 나라의 평범한 물건을 사 들고 오는 거야 전혀 죄책감 느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홀가분하다.    

 

 

 강현 님을 인천까지 모시고 날아갈 우리 뱅기 (밴쿠버 국제공항)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실내등이 켜지면서 쥐죽은듯이 고요했던 기내가 갑자기 기상시간을 맞은 군대 내무반처럼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곧 수완나폼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니 테이블을 의자에 붙이고 의자 등받이를 바로 해 달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어폰을 뽑아 iPod에 돌돌 만 뒤 숄더 백 안에 집어 넣었다. 두 좌석씩 배열된 창가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들 중에는 신혼여행객으로 보이는 커플들이 많았다.       

 

밤 아홉 시 정각, 대한항공 보잉 777 비행기는 그 육중한 기체를 수안나품 공항 활주로에 내려 놓았다. 착륙하고서도 10 여 분 가까이나 굴러가서야 비행기는 그 앞 대가리를 보딩브리지에 갖다 붙였다. 그러자 승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일어나 저마다 overhead bin 에서 짐들을 꺼내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꺼내야 할 짐도 없었지만, 미리부터 복도에 선 채로 비행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복도에 늘어서 있던 승객들이 거의 사라질 때쯤 이야 일어서서 탑승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수안나품 공항은 지은 지 얼마 안됐는데도 뭔가 우중충하고 오래된 느낌이었다. 어두운 조명과 warehouse처럼 천정을 마감하지 않은 디자인이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지도 몰랐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데도 실내에는 습하면서 후덥지근한 기운이 돌았다.    

 

입국수속은 간단했다. 입국 심사관은 이지적으로 생긴 20 대 후반 여자였다. 철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이 제법 날카로웠는데, 여권에 붙은 사진과 나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고는 여권을 스캔한 뒤 입국스탬프를 꽝하고 찍었다. 한마디 물어보는 법도 없었다. 

 

컨베이어에서 내 빈 가방을 찾아 녹색출구(세관에 신고할 소지품이 없는 사람들이 나가는 문)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TAXI’라고 쓰여진 팻말을 들고 있는 삐끼들이 눈에 들어왔다. 팻말을 들고 서 있을 뿐 호객행위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TAT 부스는 왼쪽 구석에 처 박혀 있어서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카운터에는 40 대 여자 두 명이 졸린 눈을 하고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뭐가 반가운지 활짝 웃는다. 원래 미소가 자연스러운 성격들인지 누가 오면 미소를 지으라고 교육을 받은 건지는 잘 분간이 안 갔다. 

 

“Bangkok city map please” 

(시내 지도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A4 용지를 반으로 접은 크기의 영어로 된 지도 책자를 하나 건네준다. 

 

“컵쿤 캅”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태국어로 인사하자 또 한 번 활짝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인사한다. 아마 태국 식 예의인 모양이다.  

 

공항환전소에서는 2000 바트 (약 CN 60 $) 만 환전했다. 전광판을 보니 캐나다화는 살 때와 팔 때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 환율이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다. 

 

호기심이 일어나 한국 원화를 보았다. 살 때 21 팔 때 40, 무려 두 배 가까이나 차이가 났다. 100 바트를 구하려면 4000 원을 지불해야 하는데 반해 거꾸로 100 바트를 한화로 다시 바꾸면 2100 원 밖에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예상과는 달리 한국 원화가 태국에서는 휴지조각 취급을 받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미화의 경우에는 100 불 권과 소액권의 환율이 각각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었다. 

 

“빠이 롱램 방콕 차다 캅”

 

출국장에 올라가서 택시를 탈까 하다가 그냥 입국장에서 타기로 했다. 입국장에서 택시를 타면 택시정류소에서 50 바트를 수수료로 내야 한다. 그러나 안내원이 택시번호를 적어놓기 때문에 승객만 좀 똑똑하게 처신하면 바가지를 쓴 다거나 할 확률이 적었다. 

 

입국장 바깥에는 노란색 녹색 빨간색 등 각양각색의 택시들이 사선으로 정차한 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서 있는 택시들이 몽땅 한 가지 브랜드 (토요타  코롤라)라는 것 이었다. 방콕에 머무는 4 일 간 토요타 코롤라가 아닌 차종의 택시는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공항안내원이 소개해 준 택시기사를 따라 빨간색 코롤라에 올랐다. 일본처럼 운전석이 오른쪽에 붙어 있었다. 

 

“빠이 롱램 방콕 차다 캅” 

(Bangkok Cha-Da 호텔로 갑시다) 

 

가방을 싣고 뒷자리에 앉자마자 젊잖게 태국 말로 한마디 했다. 마치 방콕 지리를 잘 아는 것처럼. 

 

택시기사는 머리를 짧게 깎은 순박하게 생긴 30 대 사내였다. 미터를 누르고는 “하이웨이?” 하고 물어왔다. 이 시간에는 하이웨이로 가지 않아도 길이 막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통행료 25 바트 (75 센트) 때문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It’s up to you” (맘대로 하세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못 알아듣고는 다시 “하이웨이?”라고 물어왔다. 아차 싶어 나도 “예스, 고 하이웨이” 하며 탱글리쉬(?)를 구사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크게 끄떡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순박하게 생긴 사내의 운전 솜씨는 그야말로 명인의 경지였다. 서울의 번개택시를 방콕에서 전수 받은 기술로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실력이 탁월했다. 태국 자체가 난생 처음이지만 공항에서 호텔까지의 길은 대충 알았다. 왼쪽에 까르푸와 로빈슨 백화점 간판이 보이자 거의 다 온 것을 알았다. 

 

기사에게 앞에 보이는 에메랄드 호텔 네온사인을 가리키며 그 맞은 편에 있는 호텔이라고 알려주었다. 210 바트가 나왔다. 100 바트 짜리 지폐 두 장과 50 바트 짜리 한 장을 주며 “Keep the change” 하자 두 손을 모아 인사하고는 뛰어내려 가방을 내려주고는 또 합장을 한다. 이번에는 나도 합장을 했다.

 

택시가 채 떠나기도 전에 빨간색 상의를 걸쳐 입은 웬 20대 사내가 뛰어나오더니 다짜고짜 내 트렁크를 번쩍 들고는 로비를 향해 부리나케 올라갔다. 빈 가방이라 가볍긴 하겠지만 바퀴가 달려있어 굳이 들고 갈 필요가 없는데도 프런트데스크 앞에 가서야 트렁크를 내려 놓는다. 

 

 

 

 

호텔은 보수공사를 하는지 어수선했다. 프런트데스크도 한 쪽에 임시로 마련한 것인 듯 했다. 프런트데스크에는 키가 작고 까무잡잡하면서도 아주 예쁘게 생긴 여직원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싸왓디 캅” 

 

내가 태국어로 인사를 하며 예약 바우처를 내밀자 자기도 미소를 지으며 태국어로 뭐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는 코리안? 하고 물어온다. 이 요정같이 생긴 여자는 얼굴만 보고도 손님의 모국을 알아 맞추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패스포트를 달라기에 주니까 이번에는 “아, 캐나다” 하며 “I am wrong” 한다. 내가 손을 저으며 말해줬다. 

 

“No, no. You were not wrong. I have Canadian passport, but I am originally from Korea. You must be a mind reader”  (아뇨. 바로 맞추셨어요. 국적은 캐나다지만 한국 사람 맞아요. 점쟁이가 따로 없군요.)

 

사실 게스트하우스도 아닌 호텔의 프런트데스크 직원이 초면에 손님의 국적을 농담 삼아 지레 짐작해 말하는 건 실례에 속했다. 그러나 나는 이 예쁘고 수다스런 아가씨의 실례(?)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눈을 찡긋하며 이런 부탁을 했다.

 

“I guess your hotel is under renovation. Can I get a room the renovation already done? Non-smoking, highest floor as possible.”

(이 호텔 리모델링 중인 것 같은데 기왕이면 새로 단장한 방으로 부탁합니다. 금연실로 층은 높을수록 좋아요.)   

 

결국 체크인 현장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딜럭스룸의 카드키를 받아 들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1403 호실. 이 호텔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아까 내 트렁크를 들고 뛴 도어맨 에게는 20 바트짜리 한 장을 쥐어 주었다.

 

초록색 카피트가 깔린 내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아주 깔끔하고 쾌적했다. 더블베드 매트리스의 탄력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넓은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탁 트인 전망이었다. 야경이랄 것 까진 없었지만 거리적 거리는 것 없이 스카이라인과 먼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건 도시호텔에 묵을 때는 행운에 속하는 일이었다. 

 

 

 3 일 간 묵었던 호텔 객실(14 층)에서 바라본 방콕 변두리  

 

태국의 한 영어사이트(hotels2thailand.com)에서 박당 999 바트(약 30 불)에 구입한 방이었다. 혼자 다니면서 고급호텔에 묵을 필요는 없었다.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리조트라면 몰라도 매일 꼭두새벽에 나가 오밤중에 들어오는 도시관광을 하면서 숙소에 많은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깔끔하고 프라이버시와 함께 기본적인 안락함만 보장되면 충분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하이네켄과 태국맥주 싱하, 그리고 음료수와 생수 두 병이 들어 있었다. 하이네켄을 하나 집어 들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밤 11 시가 채 안됐다. 예정대로라면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니까, 근처에 있는 훼이꽝 야시장을 둘러 보아야 했다. 나갈까? 만사가 귀찮았다.

 

나가는 대신 TV를 켰다. 영어방송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대머리 사내가 쇳소리를 내며 뭐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러쉬 림보였다. 그와 함께 등장한 패널들이 미국 대선을 둘러 싸고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패널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보니 하나같이 해골이 잘못 끼워진 저능아들 같았다. 토론이 아니라 한 목소리로 오바마쪽으로 기울어진 미국의 표심이 마치 저주 받을 일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들을 떨고 있었다. 오바마가 당선되면 미국의 전통과 가치가 당장이라도 무너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악을 써댔다. 

 

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전통과 가치를 기준으로 하면 공화당원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만 미국시민의 자격이 있다는 식이었다. 하필이면 처음 와보는 나라에서 처음 틀은 TV채널이 FOX 라니. 채널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홍콩에서 보내는 영어방송이었는데 뉴스였다. 여기서는 폐사해 가는 세계금융자본주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깨다

 

어디선가 ‘꼬끼오’ 하고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들려 꿈인가 했는데 깨어보니 실제로 닭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창 밖은 아직 깜깜했다.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3 시 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염병할’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태국 닭은 오밤중에 우나 하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대도시 한복판에서 웬 닭 우는 소리가 들리나 싶어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깜깜한 밤에 그것도 14 층 꼭대기에서, 닭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 시간에 한 번 깨면 좀처럼 다시 잠들기 어려운 성미라 아예 다시 자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숄더 백에서 책들을 꺼냈다. 

 

에드먼턴에서 올 때 부피가 작은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다. 그 중 하나는 Cynthia M. Campbell 이 쓴 ‘A Multitude of Blessings’’였다.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책이었는데, 몇 달 전 아마존에서 구입한 후 한 줄도 읽은 적이 없었다. 

 

또 한 권은 ‘트래블 게릴라’ 천소현이 지은 ‘금요일에 떠나는 방콕’이라는 소책자였다. 지난 여름 한국을 다녀온 조카가 사다 준 책이다. 이미 방콕에 대한 기본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수집해 놓았지만, 현장에서 동선을 다시 점검하는 데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게 편집을 잘 해 놓은 책이라 가지고 왔다. 어차피 다시 잠들기는 틀렸고, 침대 위에서 두 책을 번갈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방콕 차다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레스토랑이 일찍 문을 연다는 것이다. 아침식사 buffet를 새벽 5 시 30 분에 시작한다. 6 시쯤 엘리베이터를 타고 3 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자색계통의 전통의상을 입은 여직원이 “Good morning, sir” 하며 정중하게 식당 안으로 안내했다. 큰 길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이 트기 시작한 아침 여명 속에 차들이 제법 많이 다니고 있었다. 승용차는 주로 일제 소형차들 이었다. 모터사이클이 특히 많았는데 요란한 소음의 주범인 듯 했다. 픽업트럭의 짐 칸에 사람들이 가득 타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는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픽업트럭의 짐 칸에 앉아 출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10 분쯤 창 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길거리 풍경을 구경하다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둘러 보았다. 각종 샐러드, 플레인 요구르트, 수박, 파인애플, 구운 토마토, 토스트, 소시지, 오믈릿, 해쉬 브라운(구운 감자), 시리얼, 볶음밥, 흰 밥, 중국식 고기 야채요리, 닭죽, 돼지고기 죽, 커피, 차, 우유, 세가지 과일주스 등이 차려져 있었다.        

 

접시와 공기에 각각 야채볶음과 닭죽, 다른 접시에는 수박과 패인애플을 가져와 한꺼번에 테이블에 늘어놓고 닭죽, 야채볶음, 과일 순으로 수저와 포크를 놀리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나는 식사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식사를 하면서도 머리 속은 오늘 일정에 대해 디테일한 정리를 하느라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호텔에는 방 안에 안전금고(safety box)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할 수 없이 어제 공항에서 환전한 약간의 태국 바트화, 시내에 나가 환전할 캐나다화 300 불, 비자카드 한 개, 여권카피 한 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지갑과 여권은 프런트 금고에 보관했다. 프런트 금고는 은행금고처럼 매니저와 손님이 각각 보관하고 있는 두 개의 키를 동시에 넣고 돌려야만 열리게끔 되어 있었다.   

 

지하철(MRT)을 타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인데도 습하고 더운 느낌이었다. 공기까지 매캐했다. 호텔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베이지 바탕에 빨간 줄이 그려진 버스 두 대가 연달아 매연을 뿜으며 정류장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창문을 위 아래로 여닫는 구식 미쯔비시 버스였다. 어디서 저런 버스를 봤더라. 아마 1970 년 대 초에 굴러 다니던 서울 시내버스가 저렇게 생겼을 것이다. 

추억의 내리닫이 창문 시내버스. 163 번 구파발가는 버스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인도의 보도블록 또한 아주 낮 익은 것 이었다. 30cm X 30cm 정사각형 시멘트 보도블록. 이건 서울 1980 년대 모드였다. 그 시절 DDD 정권과 7 년 전쟁을 하면서 숫하게 깨뜨려 써먹었던 주 무기였으니 내가 잊을 리가 없었다. 

 

 이 보도블럭 기억나시나요?

 

지하철 훼이쾅 역은 호텔에서 도보로 5 분 거리에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을 천천히 걸어왔는데도 벌써부터 목덜미에 땀이 번지고 있었다. 지하철 역 입구에서는 경비가 버티고 서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가방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경비의 복장이 아주 가관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약간 퍼진 몸매의 20 대 청년이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쓰는 검은색 베레모에 헌병처럼 하얀 꽈배기 밧줄을 어깨에 매달고 있었다. 내 차례가 와서 숄더 백을 열어 보여주자 형식적으로 한 번 힐끗 쳐다본 뒤 거수경례를 하며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짜오프라야 강

 

짜오프라야 강 르아두언(수상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사판탁신 역으로 가야했다. 사판탁신으로 가려면 지하철로 다운타운 실롬 역까지 간 뒤, 같이 붙어있는 지상철(BTS) 살라댕 역에서 지상철로 갈아타야 했다. 자동매표기에 실롬 역의 요금구간을 누르고10 바트 짜리 동전 네 개를 투입하자 동그란 검은 색 자석 토큰과 거스름돈이 나왔다. 자석토큰을 개찰구의 스캐너가까이 대자 삐 소리와 함께 녹색 불이 켜지며 앞을 가로막고 있던 개찰구 블록이 사라졌다. 

 

지하철은 쾌적하고 시원했다. 요금은 지하철과 지상철을 합쳐 50 바트가 넘었다.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무척 비싼 편이었다. 지하철과 지상철이 환승이 되지 않고 각각 따로 요금을 내야 한다는 점도 이상했다. 

 

한 번 갈아타기는 했지만 지하철 훼이쾅 역에서 지상철 사판탁신 역까지의 거리는 아무리 멀게 봐줘도 서울 지하철의 2 구간 정도였다. 내가 알기로 서울 지하철 2 구간 요금은 1200 원 정도였다. 그런데 방콕 지하철-지상철은 당시 환율로 2000 원 가까운 요금이었으니 서울보다도 훨씬 비싼 셈이었다. 

 

사판탁신 역에서 수상버스를 타는 타 사톤은 바로 지척이었다. 부두는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탁한 갈색이었는데 잔잔하지가 않고 몹시 심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아마 배들이 하도 많이 왕래하다 보니 별로 폭이 넓지 않은 강이 이렇게 심하게 출렁이는 것 같았다. 

 

배가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배의 밧줄을 묶고 푸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타 창’하고 소리치자 타라고 손짓한다. 20 m 정도 길이의 천막을 씌운 길쭉한 모터보트였는데 두 명씩 앉는 플라스틱의자 가 두 열로 배치돼 있었다. 선착장 인부가 밧줄을 풀자마자 수상버스는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출렁이는 강물을 양 옆으로 가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마주 오는 수상버스와 비껴갈 때는 배가 양 옆으로 요동쳤다. 

 

가만 보니 강 위에는 수상버스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배들이 떠 다니고 있었다. 작은 모터보트는 물론이고 뗏목도 보였다. 엄청나게 큰 군함간이 생긴 거선이 거적 데기를 덮어쓴 채 내가 탄 배 옆으로 지나갔다. 강가에는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호텔들이었는데 이미 사진으로 검색을 마친 것들이어서 눈에 익었다. 저건 샹그릴라, 저건 오리엔탈, 강 건너 저건 페닌슐라. 보는 족족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였다. 

 

 

 강북의 부촌 2 층 판자집

 

그 고층 건물들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1960 년대 미아리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다 쓰러져 가는 수상가옥들이 강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 목조 판자집들이 나무기둥 몇 개의 의지한 채 출렁이는 강물 위에 버티고 있는 게 신기했다. 때가 덕지덕지 붙은 창문 밖으로는 누더기 같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인기척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 사는 집인 것 만은 분명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이 강으로 연간 수 천 만 명의 해외관광객들이 지나 다닐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저녁마다 상다리가 부러져라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요란지랄을 떨며 지나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디너크루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강남의 빈촌 단층 판자집

 

타 창에서 왕궁을 가려면 선착장에 이어져 있는 시장통을 통과하여 10 분 정도 걸어야 했다. 강바람을 맞으며 배를 타고 올 땐 잠시 잊었던 찌는듯한 더위가 다시 몰려왔다. 거리에는 긴 소매 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덥지도 않은 모양이다. 내리닫이 창문을 모두 연 채 다니는 고물 시내버스, 모터싸이클을 삼륜차로 개조해 만든 툭툭, 그 외에도 온갖 종류의 고물 차들이 소음과 매연을 내뿜고 있는 거리를 얼굴을 찌 뿌린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 보니 이게 돈 쓰고 뭔 지랄인가 하는 생각이 다 들었다.

 

 

사실 왕궁은 태국에 왔으니 봐 주고 간다는 마음으로 일정에 넣었을 뿐 별 관심은 없었다. 태국 종교미술과 건축양식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왓 프라깨우(에메랄드 사원)의 모습이나 사진에 담아가자는 생각마저 없었다면 여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흰 담이 시작되고, 작은 문 앞에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세워 총 자세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물어 보지 않아도 이곳이 왕궁임을 알 수 있었다. 뒤에서 독일어가 들려 돌아보니 두 젊은 백인 남녀가 내 뒤에서 따라 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현지인과 외국인 관광객은 쉽게 식별이 가능했다. 아무 표정 없이 단정히 걷고 있으면 현지인이요, 벗어 부치고도 모자 따위를 벗어 연방 부채질을 해대고 있으면 십중팔구 외국인이었다. 동양인 관광객 중에는 의외로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왕궁에 입장하려면 복장이 규정에 맞아야 했다. 정장까지는 필요 없었지만, 반바지나 소매 없는 상의, 슬리퍼 같은 것을 끌고는 입장할 수 없었다. 입장료는 300 바트. 왕궁과 왓 프라깨우, 그리고 시내 북쪽에 따로 잡고 있는 위만멕 궁전 입장권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아침 8 시 반이 되자 매표소가 문을 열었다. 

 

 

 

최근 반정부시위 때문인지 왕궁의 경비는 삼엄했다. 나를 비롯한 첫 관람객들이 왕궁 정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약 2 개 중대 규모의 병력이 단독군장 차림으로 일조점호를 받고 있었다. 간부로 보이는 중년의 제복이 앞에 서서 열심히 구라를 풀고 있었는데 병사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다.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처나 수방사 소속 부대인데 그 기강이 사뭇 자유스러운 당나라 군대였다.

 

더위에 쫓겨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대충 둘러보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읽은 ‘태국사원 감상요령’이 생각났다. ‘눈을 감으면 눈부시게 화려하던 영상은 사라지고 맑은 풍경소리가 은은히 들려올 것이라고’. 그 말을 믿고 눈을 감아 보았다. 풍경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무더위에 지쳐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풍경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옆에 단청이 칠해진 건물이 보이자 그리로 서둘러 걸어 들어갔다. 힌두교 신화 라마야나가 태국인의 상상력에 의해 각색되어 벽화로 그려진 화랑에서는 좀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실내라 좀 시원했기 때문이었다.    

 

왕궁에서 카오싼은 가까웠다. 다만 방람푸(카오싼) 선착장에서 왓차나쏭크람의 절 구내를 통과해서 카오싼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좀 복잡해 다소 시간을 지체했다. 카오싼과 람부뜨리거리는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왕궁에서 카오산으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배낭여행자들이 먹고 자고 마시고 즐기는 소란스럽고 신나는 곳이지만 그건 해가지고 난 다음의 이야기다. 거리거리 마다 여행자들을 상대로 한 선물가게, 옷 가게, 잡화점, 환전소, 선술집, 식당, 그리고 노천카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람부뜨리 거리에 있는 위앙따이 호텔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 호텔을 찾은 이유는 바로 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짜이디 마사지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지만 태사랑 등 태국 관련 사이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업소였다. 마지막 날 고급 스파를 예약해 놓은 상태라 오늘과 내일은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의 발 마사지와 전통 타이 마사지를 일정에 잡아 놓았다.  

  

 

발 마사지 30 분 전통 타이 마사지 한 시간 해서 모두 한 시간 반을 받았는데 고작 250 바트를 받는다. 캐나다화 8 불도 안 되는 가격이다. 그런데다가 차와 과일까지 공손하게 갖다 바치니 손님인 내가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기분이 그래서만이 아니라 마시지를 받고 나니 정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 졌다. 아침에 많이 걸어서 다리도 피곤했는데, 발의 피로감도 사라졌다. 팁까지 100 바트 짜리 석장을 주고 담당 테라피스트의 전송을 받으며 다시 람부뜨리 거리로 나왔다.

 

 

 

 

낮의 카오산거리는 별로 볼 것이 없었다. 곧바로 환전소로 가서 캐나다화 300 불을 바트화로 환전했다. 어젯밤 공항 환전소보다는 유리한 환율이었다. 그래 봤자 몇 십 바트 차이지만 약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천카페에 들러 수박주스를 하나 사 들고 파라솔 아래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것 저것 통밥을 굴려보기 위해서였다. 

 

영화 ‘American Gangster’에 나온 장면 하나가 생각났다. Frank Lucas(덴젤 워싱턴 분)가 헤로인 밀매조직의 중개인을 만나기 위해 방콕에 왔을 때 인력거를 타고 나타났던 곳. 한자간판이 많았던 것으로 봐서 차이나타운일 것이다. 실제 영화촬영장소가 방콕이 아닌 치앙마이였다는 기사를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어쨌거나 당장 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1968 년이 아니니 인력거를 구할 길은 없었다. 비슷한 기분을 내기 위해 뚝뚝을 찾았다. 모터사이클을 삼륜으로 개조해 만든 뚝뚝은 전혀 내 취향도 아닐 뿐 아니라 쾌적하고 시원한 택시에 비해 싸지도 않았다. 호객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는 기사를 불러내 50 바트를 내기로 하고 야왈릿 거리(차이나타운 중심가)까지 가자고 했다. 

 

 

 

야왈릿 거리는 영화에서처럼 사장바닥 같은 거리가 아니라 교통체증으로 혼잡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대도시 타운이었다. 금은방, 한약방이 많이 눈에 띄었다. 차이나타운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바비큐 오리와 소이치킨 등을 갈고리에 걸어 매달아 놓은 식당들도 있었다. 윈도 안에 걸어놓은 바비큐 덕(duck)이 반가와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옆 가게가 가죽제품을 파는 도매상이다. 

 

나는 여행 다닐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지갑을 두 개 가지고 다닌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습관이 들어서다. 언젠가 멀쩡한 새 지갑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아주 고급스런 악어가죽 지갑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지갑 두 개를 같이 가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이제 지갑을 두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습관처럼 돼 버렸다.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그 번거로운 습관이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하나를 잃어버려도 다른 신용카드와 현금이 있는 지갑이 있으면 패닉에 빠지지 않고 ‘계속 작동’이 가능하다. 그 두 개의 지갑 중 하나가 너무 낡아 바꿀 때가 됐다. 

 

가죽제품 도매상에서 잠금 버튼이 달린 가오리지갑하나를 집어 들었다. 과묵하게 생긴 50 대 남자가 잠자코 계산기를 내게 내민다. 계산기는 왜 주나 하고 받아서 들여다 보니 1500이 찍혀있다. 가격이1500 바트란 말일 것이다. 나도 잠자코 계산기에 숫자를 찍어 돌려 주었다. 

 

장난기가 발동했기 도 했지만 깎고 싶은 마음도 있어 750을 찍었다. 고개를 젓는다. 두 말없이 돌아섰다.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데 내 귀에는 “Excuse me”로 들린다. 이번에는 영어로 “다우전”한다. 손님이 이런 거래에 도가 튼 빠꼼임을 인정하는 파격적인 오퍼 가격이다. 아마 내가 부르는 가격이 마지막 오퍼가 될 것이다. 

 

“OK, eight fifty, this is final” 

(850 바트, 안되면 그냥 가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졌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가져 가란다. 마치 손해보고 팔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다. 850 바트라도 아마 원가에서 두 배는 더 받아 먹었을 것이다. 

 

대로 양 옆으로 퍼져 있는 차이나타운 시장통처럼 타임머신 여행을 하기에 알맞은 곳도 없었다. 

 

산 닭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참 오랜 만에 보는 광경이다. 철망우리 안에는 사납게 생긴 갈색 닭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혹시 옛날 한국 시장통의 산 닭 집들처럼 목을 칼로 푹 찌른 다음 뜨거운 물통에 집어 던지는 건 아닌가 살펴봤지만, 밖에서는 도살기구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새벽마다 호텔방까지 둘려 오던 닭 우는 소리가 꿈 속에서 들은 환청이 아니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할까 하다가 옥상에 있는 수영장에 올라갔다. 마침 구름이 해를 가려줘서 땡볕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30 분 정도 풀을 독차지하고 수영을 하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나 말고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비키니 차림의 동양 여자 둘이 더 있긴 했는데 내가 수영하는 동안 내내 플라스틱 침대에 자빠져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풀을 혼자 사용할 수가 있었다.    

 

호텔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꽝시푸드’라는 해산물 식당이 있었는데 여행카페 등에서 제법 정평이 나 있는 곳 이었다. 게(crab)를 카레와 고추기름에 볶은 요리와 쌀밥을 사 들고 방으로 올라와 TV를 보며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아고고바의 언니들

 

쑤언룸 나이트 바자는 지하철 룸피니 역 3 번 출구와 바로 연결돼 있었다. 매장의 규모가 상당히 넓어서 대충 돌아보는데 만도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아쉽게도 방콕의 명물인 짜뚜짝 시장은 주말에만 연다. 이곳은 꿩 대신 닭으로 찾은 곳이다. 역시 관광객을 주 대상으로 장사하는 쇼핑장소라 그런지 예상보다 가격이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태국비단 제품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캐나다 보다는 싸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 비한다면, 글쎄. 

 

나나 엔터테인먼트는 BTS나나 역 근처에 있었다. 별로 넓지 않은 공간에 2 층 건물들이 ㄷ자 형태로 늘어서 있고 그 안에 아고고바(태국식 스트립바)를 비롯한 성인업소들이 들어차 있었다. 이 건물들의 2 층은 온갖 형태의 성인 쇼로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 저기서 삐끼들이 눈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적극적인 호객은 안 하는 것 같았다. 

 

아고고바 형태의 성 매매산업의 중심은 원래 나나 엔터테인먼트가 자리잡고 있는 수쿰윗 지역이 아니라 살라댕 일대가 그 원조다. 팟퐁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스트립 바 말고도 남, 녀, 트랜스젠더 등 모든 성 정체성이 총출연한 온갖 엽기적인 성인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1960 년대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을 위해 마련된 ‘후방 정신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당시 미국정부의 공작과 지원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지금은 미군 대신 유럽과 북미, 일본과 한국 등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밤만 되면 불야성을 이루며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이고 있다. 

 

나나 엔터테인먼트는 시끄럽고 사고가 잦은 팟퐁의 거친 문화를 천박하게 여기는 고상한 가치관을 가진 성매매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나름대로 철학과 차별성을 가지고 출발한 사창가인 셈이다. 

 

레인보우라는 붉은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가게의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이키 조명아래 무대 위에서 검은 색 비키니 차림으로 봉을 잡고 서 있는 수 십 명의 댄서들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객석을 훑어보았는데 의외로 손님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월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객석테이블에는 교복차림을 한 여자들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아마 들어서는 손님을 발견하는 즉시 벌떼처럼 달려들어 콜라를 사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이 틀림없었다. 곧바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아고고바를 성매매 업소라고 단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아고고바는 눈으로만 즐기는 스트립 바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봉에 매달려 나체로 춤추는 댄서들도 단순한 exotic dancer들이 아니다. 거의 모든 댄서들의 주수입원은 아고고바에서 받는 기본급이 아니라 고객의 낙점을 받아 업소 밖으로 나가서 그 고객과 함께 벌이는 ‘2차 쇼’의 대가였다.   

 

ㄷ자 공간 안에는 노천 술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히려 그곳은 온갖 인종들로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리 저리 둘러 보다가 빈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May I?” 

(빈자린가요?)

 

태국 현지인으로 보이는 20대 여자를 옆에 앉혀 놓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구라를 풀고 있는 늙수그레한 백인 영감탱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놀란 눈으로 쳐다 보다가 “Sure, sure” 하며 자리를 권한다. 엑센트로 보아 아마 유럽 어딘가에서 굴러 들어왔을 것이다.

 

바텐더가 다가와 눈웃음을 보냈다. 왔으면 빨리 주문부터 하라는 신호다. 싱하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병을 따지 말고 오프너와 함께 가져 오도록 바텐더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옆자리의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How are you doing tonight?”

(안녕하세요?)

 

“Not too bad, not too bad”.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까도 “Sure, sure” 하더니 이 작자는 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So, is everything going smooth?”

 

“건성으로 야, 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원조교제’ 작업은 착착 잘 진행돼 가냐고 물은 것인데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씨리랏 병원에서 시체들과 함께

 

씨리랏 병원 (Siriraj Medical Center) 은 짜오프라야 강 건너편 톤부리 지역에 있었다. 그 병원의 법의학 박물관(forensic Medicine Museum)과 해부학 박물관(Anatomical Museum)을 우연히 자료에서 발견해 물어 물어 찾아 갔다. 이 병원에서는 모두 여섯 개의 의학 박물관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병원은 롯파이 선착장에서 걸어서 약 5 분 거리에 있었는데 여기 저기서 건물 보수공사를 하느라고 몹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두 박물관은 각각 다른 건물에 있었지만 영어로 된 안내표지판이 곳곳에 붙어 있어 찾는데 애를 먹지는 않았다. 

 

 

 수술 중 숨진 여아의 유해

 

해부학 박물관은 오래된 2 층 목조건물이었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건물 안에 없는 듯 했다.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계단을 통해 2 층으로 올라가서 박물관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실제 사고나 질병 등으로 죽은 사람들의 뼈와 두개골, 신체부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몸이 붙은 채 태어나 분리수술을 받다가 죽은 유해 그대로를 유리관 안에 보관해 놓은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병원 자체가 1930 년대 경성기담에 나오는 사체 부검실 분위기였다. 법의학 박물관에는 어린이들을 살해한 뒤 간을 도려내 요리해 먹은 사건으로 태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나이를 비롯하여 각종 엽기적인 범죄사건 주인공들의 시신이 미이라 형태로 보존돼 있었다. 

 

왠지 이 두 박물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고요한 한밤중에 혼자 다시 와서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생충 박물관 (Parasitology Museum)은 어디에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법의학 박물관 근처가 아니었나 싶다. 기억에 남는 것은 수백 마리의 요충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어린아이의 사진과 사상충 (filarial) 감염으로 림프액의 흐름이 막혀 고환이 바위(과장이 아니다)만큼 커진 환자의 모형, 그리고 유리관 안에 있는 실제 샘플의 모습이었다.   

 

병원을 나오자 그새 기온이 더 올랐는지 날이 몹시 더웠다. 어제는 가끔 흐리기라도 했었는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롯파이 선착장까지 걸어가면서 양산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서 선착장까지는 주택가인지 시장통인지 잘 구분이 안가는 판자가옥들이 이어져 있었다. 왕궁이 있는 짜오프라야 강 건너편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가난에 찌들린듯한 모습의 아낙네들이 길거리에 좌판을 벌여 놓고 잡다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여기 저기서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다. 

 

싸얌 패라곤과 월텟

 

태국 최대 쇼핑몰 싸얌 패라곤은 BTS 싸얌 역에서 가까웠다. 싸톤 선착장과 붙어있는 사판탁신 역에서 BTS를 타고 10 분 만에 도착했다. 정확히 여섯 정거장이었다. 

 

사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쇼핑몰이 있는 에드먼턴에 사는 나에게 싸얌 패라곤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냥 서구국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쇼핑몰에 불과했다. 각종 브랜드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지만 태국까지 와서 브랜드 제품을 더 비싸게 주고 살 이유는 없었다. 다만 새로 지어서 그런지 깨끗했고 더위에 시달리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에 있는 food court로 내려갔다. 배가 고프면 수끼를 먹으려고 했는데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사실 수끼는 혼자 먹기는 좀 부담스러운 음식이었다. 결국 각종 면 종류를 파는 코너에서 팟타이를 시켰다. 

 

싸얌과 칫롬일대는 방콕 최대의 번화가였다. ?얌 패라곤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 (월텟)를 중심으로 쇼핑 중심지가 형성돼 있었다. 전자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마분크롱, 대형 할인매장인 빅씨 등이 모두 이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월텟 근처에는 광장 같은 것이 있었는데 한 쪽에 마련된 대형 패나소닉 모니터에서 각종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노점에서 밀크 쉐이크를 하나 사 들고 그늘을 찾았다. 마침 커다란 가로수 아래 대리석으로 만들어 진 의자를 발견하고 가서 앉았다.

 

베이스 볼 캡을 벗어 들고 연방 부채질을 해가며 밀크 쉐이크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10 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 앞에 마련된 불상과 향로를 발견하고서야 그 사람들이 왜 뙤약볕이 내리 쬐는 광장 한 복판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데이트 중인 남 녀 커플인 것 같았고, 한 쪽에 따로 서 있는 짧은 커트머리는 20 대 중반의 여자였다. 몸에 착 달라붙는 소매 없는 연두색 상의에 검은색 몸빼치마 차림의 그 여자는 무척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무슨 간절한 서원거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 더위에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서원하는 태국 아가씨

 

태국의 부유층이 주로 이용하는 명품백화점 게이손 플라자는 랏챠담리 거리를 사이에 두고 월텟의 남쪽에 위치한 이세탄 백화점과 마주보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다른 지역에 비해 세련된 느낌이었다. 어느 나라나 빈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이 도시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주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랏챠담리 거리를 가로지르는 지상통로 위에 서서 자동차들의 행렬을 바라 보았다. 신호대기선 앞에 같이 모여 있다가 요란한 소음과 매연을 뿜으며 한꺼번에 출발하곤 하는 모터싸이클들의 모습이 이국적이었다.      

 

 

 

번화가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자니 요즘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를 아직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캐나다에서 출발할 때는 방콕 시내 전체가 시위대와 경찰 그리고 친(親)정부 폭력배들간에 벌어지는 폭력사태로 아수라장이라도 된 듯 외신보도가 요란했었다. 

 

실제로 전 총리 탁신을 지지하는 폭력배들이 탁신과 같은 계보이자 그 후계자들이 모인 집단이랄 수 밖에 없는 현 정부의 방관아래 시위대를 습격하여 사망자까지 발생했고 이 때문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마당이었다. 

 

외국인 여행자인 내 입장에서야 이런 소식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는데, 막상 내가 돌아다녀 본 방콕은 아직까지는 평온했다. 한국의 이XX 씨를 빼다 박은 듯한 경력과 정치철학을 가진 이 나라의 전 총리 탁신은 역시 한국의 친미보수세력만큼이나 그 생명력이 끈질긴 태국의 현 정부를 비롯한 기득권층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실각한 후까지 정치갈등의 주인공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탁신을 닮은 이XX 씨 생각을 하자 그의 명언 하나가 떠 올랐다. 

 

“못생긴 여자를 골라야 서비스가 화끈 하다”

 

아마 작년 대선 직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한 말일 것이다. 그가 태국에서 받은 어떤 마사지를 언급한 것이 분명한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그는 그 마사지가 ‘발 마사지’였다고 해명했었다. 

 

라차다피섹 거리의 밤 문화

 

푸타이 마사지는 내가 묵고 있는 방콕 차다 호텔에서 가까웠다.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키 작은 나무들과 꽃이 심어진 정원이 아름다웠다. 타이마사지와 발 마사지를 합쳐 3 시간 코스가 600 바트. 어제 짜이디 마사지보다는 비쌌다. 시설은 깨끗햇고 테라피스트의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손 힘이 어찌나 매운지 누를 때마다 통증을 느낄 정도였는데, 손을 떼고 나면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지면서 뭉친 곳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곳의 테라피스트들은 거의 남자들이었고 여자 마사지사가 한 명 있었다. 모두 정식 마사지학교를 수료했다고 했다.

 

매니저는 30 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영어를 곧잘 했다. 그래서 마사지가 끝난 후 차를 마시면서 이것 저것 물어볼 수가 있었다. 

 

“Can customer choose therapist? 

(손님이 마사지사를 고를 수 있나요)

 

“Well, yes you can if you know somebody. Also if you don’t like, you can ask me to replace therapist. 

(손님이 아는 마사지사가 있으면요. 그리고 마사지 도중에 마사지가 마음에 안 들어도 바꿔달라고 할 수 있지요)

 

“A friend of mine said, if you wanna get service better, actually hotter, that guy said, you better choose ugly looking girl. What the heck is that mean? 

(친구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화끈한 서비스를 받으려면 못생긴 여자를 골라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 남자의 입이 묘하게 비틀어지다가 허허 하고 홍소를 터뜨렸다. 

 

“Body massage?”

(성인 마사지?)

 

“No, he said he was talking about a foot massage.”

(발 마사지 받았다고 하던데)

 

매니저와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가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내 말을 믿고 내 친구의 입장이 곤란해 질까봐 더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려 깊은 친구였다. 

 

팟퐁과 나나 그리고 소이 카우보이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트립 댄서들의 메카라면 타논 라차다피섹은 성인 마사지 팔러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거리의 북쪽 끝에는 한국 패키지 여행객들이 투숙객의 절반가까이 차지하는 그랜드 야유타야라는 대형 호텔이 있었는데 맞은 편에는 그 호텔 뺨치는 규모의 또 다른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의 성인 마사지 팔러가 그 건물 전체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남쪽으로 지하철 네 정거장(수티산-훼이쾅-순 왓타낫탐-팔람카오) 거리에 이르기까지 대형 호텔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규모의 성인 마사지 팔러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시저스는 스위소텔 콩코드 바로 옆에 엠마뉴엘, 나탈리 등은 에메랄드 호텔, 방콕 차다 호텔, 그리고 팔라죠 호텔 옆이나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에메랄드 호텔 주변에는 꽃걸이 방이나 코요티 클럽 같은 색다른 형태의 술집들이 밀집해 있었다. 

 

타논 라차다피섹에는 대형 해산물 전문점들이 많았는데 이 노천 식당들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놀랍게도 새벽 두 세 시경이었다. 매일 이 시간이면 영업을 마친 업소 언니들과 역시 볼 일을 끝냈거나 귀가길 언니들에게 수작을 걸어보려는 세계각국에서 모인 성지(性地)순례자들로 식당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꼭두새벽의 4차선 거리는 성지순례자들과 인도자(가이드)들을 태운 택시와 밴 등 각종 차량들로 마치 러시아워를 방불케 했다. 낮에는 물론 저녁에도 별로 붐비지 않았던 이 거리가 새벽이 되자 마치 장터처럼 소란스러워 진 것이다. 코 앞에 있는 호텔에서 어제 그제 이틀 밤을 지내고도 새벽 마다 이 난리 굿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내 방이 도로 쪽이 아닌 반대편을 향한 이유도 있겠지만, 호텔의 방음시설이 참 잘되어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손님이 여자를 고른다는 개념은 성인 마사지 팔러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모델 급에서부터 서 너 단계로 자기들 나름대로 등급을 정해 놓고 번호표를 붙인 반라의 푸잉(언니)들을 횟집의 활어들처럼 fishbowl(어항)이라고 부르는 유리관 안에 가두어 놓은 채 손님들로 하여금 고르게 하는 게 이 업소들의 영업 방식이었다. 여자 손님이 여자 마사지사를 고를 수도 있었고 단체로 몰려와서 푸잉들을 무더기로 골라 데리고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취향에 따라 트랜스젠더 형님들을 주문하는 고객들도 있었다.  

 

어항 밖에서는 투피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지적인 용모의 여직원이 세련된 매너로 성지순례자들을 어항이 잘 보이는 커피?으로 정중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내가 묵은 방콕 차다 호텔뿐 아니라, 거의 모든 방콕의 호텔들은 죠이너스 차지(joiners’ charge) 라는 희한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투숙객 이외의 손님이 들락거리면 돈을 받는 제도 인데 그 대상은 손님과 함께 객실로 올라가는 태국 현지인 푸잉들이었다. 

 

투숙객이 태국 현지 여자로 보이는 외부인을 데리고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안에서 내내 졸고 있던 경비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벌떡 일어나서 그들을 프런트로 안내한다. 그러면 프런트 직원은 태국 여자의 신분증을 회수해서 보관하고 투숙객으로부터는 소정의 죠이너스 차지를 징수한다. 

 

업무를 마친 태국 여자가 떠날 때는 신분증을 찾기 위해 프런트에 들를 수 밖에 없는데 그녀가 프런트에 나타나면 경비와 도어맨이 그녀 앞을 막아선다. 프런트 직원은 객실에 전화해서 투숙객에게 방금 여자가 나왔는데 뭐 없어진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이 여자를 내 보내도 좋은지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투숙객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비로소 이 태국 여자는 프런트 직원으로부터 신분증을 돌려받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만일 투숙객으로부터 분실신고가 들어오면 이 여자는 호텔 당국으로부터 치욕적인 수위의 몸수색을 당한다. 반항하면 경찰이 출동해 몸수색에 가세한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태국에서도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다. 그러나 방콕에서의 성매매산업은 여러 종류의 성매매업소와 호텔, 관광경찰의 긴밀한 관행협조 아래 준(準)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나라 산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관광산업이고 관광수입 중 상당부분이 성매매산업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니 가뜩이나 부패한 태국정부가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야 이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 이 분야에 종사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백 수십만에 달하는 종사자들이 따로 취직할 만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일 것이다.  

 

 

 20 바트 짜리 노점 팟타이

 

여행 후기

 

방콕 여행을 계획한 건 지난 3 월부터다. 우연히 ‘낫티의 타일랜드’라는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그 블로거의 말솜씨에 휘말려 들어 태국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그때부터 시간 날 때 마다 영어로 된 태국 관련 사이트와 ‘태사랑’ 등 국내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5 월이 되자 수집한 정보의 양이 제법 방대해지고 적어도 방콕에 관해서는 가보기도 전에 여행기를 써도 감쪽같을 만큼 지리, 동선, 포인트, 이동수단 등에 대한 지식체계가 잡혀갔다. 실제로 이 시기에 ‘나는 혼자 태국에 간다’라는 예고편 여행기를 써서 여기저기 올리기도 했다. 6 월경에는 3 박 5 일 자유여행 일정을 시간대 별로 구체적으로 작성하여 가족들에게 공지사항으로 이 메일을 통해 발송했다. 

 

8 월에 비행기 표 수배를 시작했다. 일종의 비즈니스 관계로 매년 가을 서울에 가는데, 원래는 에어캐나다 에어로플랜 30,000 보너스 마일을 사용하여 스타 얼라이언스 항공사의 인천-방콕 비즈니스 클라스 비행기표를 구입하려 했었다. 그런데 에드먼턴에 소재한 해피 여행사를 통해 인천 왕복 항공요금에다 불과 100 불을 추가하면 스톱오버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방콕까지 연장 왕복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니까 어차피 한국에 가는 길에 별도의 비행기 삯을 크게 더 들이지 않고 다녀 온 셈이다.    

 

그 동안 여기 저기 다니면서 깨달은 사실은 내가 박물관이나 문화유적, 또는 일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볼거리를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이었다. 그냥 다니면서 그게 이동하는 도중의 비행기 안이 됐든, 걷다가 피곤해서 잠시 들른 노천 찻집이 됐든, 처음 접하는 생경한 분위기와 환경 그 자체와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내 여행 타입을 깨닫게 된 뒤로는 시간이 쫓기며 어디 어디를 가 보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졌다. 이번 방콕 여행은 일정을 미리 짜놓긴 했지만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좀 교양 있게 표현하자면 꼴리는 대로 돌아 다녔다. 밤에 늦게 자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체질 덕분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기억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도착 다음날은 카오산과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한 구 시가지 일대를 미친 듯이 싸 돌아다녔다. 밤에는 야시장을 돌아본 후, 수쿰윗 일대의 밤 문화를 섭렵했다. 3 일 째는 일어나자마자 강을 건너 씨리랏 병원으로 직행했다. 오후에는 싸얌과 칫롬 일대에서 태국의 중산층들을 만났고 밤에는 라차다피섹의 유흥가에서 열광적인 성지순례자들을 취재(?)하며 시간을 보냈다. 4 일 째는 비교적 고급스런 스파에서 3 시간짜리 스파패키지를 받으며 다음 날부터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머리 속으로 하나씩 체크했다. 그리고 그날 밤 10 시 45 분에 출발하는 인천 행 밤 비행기에 탑승했다.  

 

왕궁과 왓 프라께우를 제외하면 알려진 명승지 어디에도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이 두 곳도 솔직히 아침에 시간을 때울 겸 배타고 지나가는 길에 있다니까 간 것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기억해 둘 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 왕궁 근처에서 본 것 중 아직까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타 창 근처의 시장 통 길바닥에서 구걸을 하는 걸인 아주머니의 등에 업힌 채, 지나가는 나를 힘없이, 그러나 빤히 쳐다보던 두 세 살쯤 된 어린아이의 슬픈 눈망울이다.

 

안 보면 반드시 후회한다는 싸얌 니라밋 쇼를 보러 가는 대신 오이시 익스프레스에 들어가서 400 바트(12 불)라는 가격에 비해 놀라우리만큼 가지 수가 많은 일식 buffet를 배가 터지도록 때려 먹었다.  트랜스젠더 쇼로 유명한 아시아 호텔의 칼립소도 파타야의 알카자도 보러 가지 않았다. 쇼를 관람하기로 한 그 시간에 아마 나나엔터테인먼트의 노천 술집에서 유럽에서 온 건달들과 사교모임(?)을 가졌던 것 같다. 다만 이 쇼들은 내년(2009 년)에 다시 갔을 때 시간이 나면 보러 갈 생각이다.  

 

내가 태국에 갈 거라는 소문이 나자 누군가 짐 톰슨 하우스를 꼭 들러 보라며 그곳에서 파는 실크타이를 추천했다. 그러나 결혼식과 장례식 참석할 때 외에는 넥타이를 맬 일이 없는 내가 짐 톰슨 박물관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실크타이를 살 일은 없었다. 

 

짐 톰슨이라는 사람만 해도 그렇다. CIA 의 전신인 OSS 공작요원이었다가 1967 년 말레이시아에서 실종된 수상쩍은 경력을 가진 그 사람이 태국 역사에서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느니 카오산 길거리의 노천식당에서 팟타이를 사 먹으며 현지인이나 여행객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는 게 ‘내가 시간을 더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내는 법’인 것 같다.   

 

내년에는 진짜 프랭크 루카스처럼 보트나 땟목을 타고 열대 밀림 사이의 계곡을 따라 골든 트라이앵글까지 올라 가 보고 싶은데 사고 당하지 않고 제대로 살아 돌아오려면 지금부터 또 정보수집을 시작해야겠다.